저출생·고령화와 지방소멸이 국가적 대응과제로 강조되는 가운데 농촌은 사회적·경제적 기능이 약해지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주택과 공장, 축사 등이 혼재된 환경은 정주 여건과 산업 육성 기반을 동시에 악화시키고 있고, 인구 유출은 생활서비스 시설 감소로 이어져 농촌생활에서 겪는 불편이 다시 인구 유입 저하 요인으로 작용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일례로 인구 1천 명 이하인 39개 읍·면 중 병원, 약국이 있는 읍·면은 한 곳도 없고, 미용실, 목욕탕, 식당이 있는 곳도 절반 이하에 그친다. 그동안 도농 균형발전을 위해 농촌 지역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져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가 개선됐지만,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개발에 그치고 공간의 계획적인 이용·관리를 위한 청사진이 미비해 난개발 및 농촌소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농촌이 지닌 잠재력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 워케이션(일과 여가 병행) 등 새로운 근무형태가 퍼지고 있고, 이른바 ‘4도3촌’ 등 농촌에 반드시 거주하지 않더라도 주말농장, 체험·휴양 등을 위해 지속적으로 농촌에서 체류·교류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2019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시민 중 14%가 5년 이내에 농촌에서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할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빈집, 폐창고 등을 리모델링해 인근 ‘논밭뷰’를 즐길 수 있는 카페를 운영하는 등 농촌의 유무형 자원을 활용해 창업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농촌이 농업이 이뤄지는 곳일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인력·자본이 유입되는 열린 기회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농촌특화지구 활용한 규제 완화, 사업 집중으로
주거·산업 기능 재배치
올해 3월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에 따라 새롭게 도입된 ‘농촌공간계획’은 농촌의 난개발·소멸 문제를 해결하고 고유한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올해부터 전국 139개 시군은 농촌이 삶터·일터·쉼터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중장기 방향을 담은 10년 단위 기본계획과 보다 구체적인 5년 단위 시행계획을 수립해 나간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4월 ‘농촌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 기본방침’을 마련해 ‘국민 누구나 살고, 일하고, 쉬는 열린 기회의 공간’을 비전으로 향후 10년간의 시군 농촌공간계획 수립 및 실행 방향성을 제시하는 밑그림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정부에서 개별사업 중심으로 추진하던 농촌정책을 지자체와 주민, 지역 공동체 등이 주도해 먼저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는 예산 등을 통합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시군은 농촌공간계획을 통해 주거, 산업, 축산, 재생에너지, 경관 등 기능별로 ‘농촌특화지구’를 지정하고 관련 시설을 집적한다. 농촌마을보호지구에는 주택, 생활서비스 인프라를 모아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농촌산업지구, 축산지구 등에는 기업체, 스마트팜, 축사 등 산업별 시설이 집적할 수 있게 해 시너지 효과를 낸다. 정부는 농지 규제 완화, 사업 집중 지원 등을 통해 농촌특화지구의 활용도를 높여나갈 계획이다.
각 시군은 3개 내외의 ‘농촌재생활성화지역’을 설정하고, 재생활성화지역별로 정주 여건 개선, 경제·일자리 기반 확충 등의 내용을 담은 농촌공간계획을 수립한다. 시군이 주민 등과 함께 지역 수요·역량을 바탕으로 계획을 수립하면, 정부는 지자체와 ‘농촌협약’을 체결하고 5년간 최대 300억 원의 국비사업을 패키지로 지원한다.
농업과 더불어 경관·생태·문화 등 고유자원 활용한
농촌형 창업 활성화
둘째, 주민의 생활서비스 이용 편의성을 높이고 농촌의 정주 여건을 개선한다. 장기적으로 정주 기능 유지 가능성이 큰 읍·면 소재지 등에 필수 인프라 투자를 강화하는 한편, 중심지-기초생활거점-배후마을을 체계적으로 연결해 생활서비스를 공급하고 사각지대를 해소한다.
또한 행정·복지·교육·문화 등 각종 시설을 복합단지화 해 주민들이 한곳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먼 거리, 낮은 인구밀도 등 농촌의 생활서비스 공급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AI, 사물인터넷과 같은 첨단기술을 적용한 서비스 공급모델 개발·도입도 추진한다. 주민과 지역공동체가 서비스 공급 주체로 직접 참여할 수 있게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활동을 지원하는 등 생활서비스 전달 체계를 다각화할 계획이다.
셋째, 농업에서 나아가 사람, 기업, 농촌자원이 융복합하는 창의적 산업생태계를 조성할 방침이다. ‘수직농장’과 같이 새로운 농업 형태의 등장에 맞춰 입지 규제 완화 등 기존 제도를 정비한다. 농업과 더불어 경관, 생태, 문화 등 농촌의 고유한 자원을 활용한 농촌형 비즈니스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청년, 기업가 등을 대상으로 창업 단계별 종합지원 체계도 구축한다. 또한 주민 등이 스스로 지역 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 등을 계획하면 맞춤형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자율규제혁신지구를 도입한다. 기존엔 개별 업체 위주였던 농촌융복합산업을 고도화해 농업 관련 전후방산업 등으로까지 정책 지원대상을 확대해 나간다.
넷째, 경관, 농업유산, 생태·환경 등 농촌의 고유한 가치를 보전하고 매력을 높인다. 농촌특화지구 유형 중 하나인 경관농업지구, 농업유산지구를 활용해 지역의 경관작물을 집단화하고, 특색 있는 지역 농업유산에 대한 보전·관리 체계를 구축한다. 주민의견을 토대로 재생에너지지구를 지정해 태양광시설 등 집단화를 유도하고, 에너지 절감 및 효율 향상 시설을 지원해 농촌 에너지자립마을을 조성한다.
다섯째, 농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생활인구’를 확충해 나간다. 과거에는 귀농인·귀촌인 등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에만 중점을 뒀다면, 앞으로는 4도3촌, 워케이션 등 농촌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유형의 ‘체류·교류’까지로 정책 범위를 확대한다. 또 빈집 등 유휴시설을 활용해 농촌에서 다양한 활동을 희망하는 생활인구에게 맞춤한 공간을 조성한다.
농촌공간계획의 핵심은 국토 면적의 89%를 차지하는 농촌에 주거, 일자리 등 국민이 바라는 기회와 꿈을 담아내는 것이고, 이를 위한 중장기 설계도를 지역에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농촌이 국민 모두에게 열린 삶터·일터·쉼터가 되고, 고유의 산업적·경제적 잠재력을 활용한 비교우위가 극대화될 때, 저출생 극복 및 성장동력 확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농촌공간계획이 주민과 함께 심도 있게 마련되고, 규제 완화 및 사업 집중 등 구체적인 실행이 뒷받침 될 수 있도록 정부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