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사크테이아(Seisachtheia)’란 무거운 짐을 덜어준다는 의미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 지도자 솔론은 부채탕감 정책인 ‘세이사크테이아’를 시행했다. 당시는 채무를 갚지 못한 사람을 노예로 삼아 육체적 노동까지 강제하는 채무노예 제도가 만연해 있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솔론은 채무를 탕감하고 채무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대대적인 사회개혁 정책을 펼쳤다. 다른 폴리스(Polis)에 노예로 팔려 간 사람들도 그 값을 지불해 데려오고 인신담보를 금지했다.
20세기 들어 주요 선진국에서는 대공황,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재건 과정에서 가계신용이 본격화됐다. 이는 경기가 둔화됐을 때 연체 증가와 함께 과도한 추심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영국은 과도한 추심으로부터 고통받는 채무자를 보호하기 위해 1970년 전후로 포괄적인 소비자신용법제를 마련했다. 독일의 경우 2002년에 채권법제를 현대화하면서 소비자신용법을 민법에 편입해 채무자 보호를 사적 자치의 일반원칙으로 인정하게 됐다.
현 채권추심 방식은 채무자 재기 지원보다
회수 극대화에 초점
우리나라도 2003년 카드대란을 겪으면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급증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연체채무자의 경제적 재기를 지원하기 위해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2002년), 법원의 개인회생(2004년) 제도가 도입됐다. 또한 2009년에는 불법적인 추심행위로부터 채무자를 보호하기 위해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책적 노력에도 금융회사 자체적으로 상시적인 채무자 보호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회사들이 채권추심 과정에서 채무자의 경제적 재기를 지원하기보다는 추심을 통해 채권을 ‘회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비판이다. 어제까지의 고객이 한 번 연체하기만 하면 외부에 업무를 위탁해 추심하고, 채권매각을 통해 고객과의 관계마저 단절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연체기간이 길어질수록 채무자의 상환능력은 급격히 감소하지만 연체이자는 계속 누적되는 한편, 추심업무의 외부 위탁과 반복적인 채권매각을 통해 추심의 주체가 바뀌면서 추심의 강도 또한 계속해서 증가하는 문제도 있었다. 금융회사의 이러한 관행은 오히려 채무자의 성실한 상환 의지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함은 물론 채권의 장기적인 회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있다.
이를 개선하고자 지난 4년여의 전문가 논의와 금융회사, 소비자단체 등 각계각층의 의견 수렴을 거쳐 「개인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개인채무자보호법」) 정부안이 2022년 12월 국회에 제출됐고, 이후 1년여의 국회 논의를 거쳐 지난 1월 「개인채무자보호법」이 제정됐다. 그리고 오는 10월 17일 그 시행을 앞두고 있다. 금융회사 대출을 연체한 이후 채무자가 겪는 전 과정에서 채무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율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연체 이후 전 과정 규율···
더 큰 부실 예방해 사회적 비용 최소화 기대
「개인채무자보호법」은 크게 금융회사의 자체적인 채무조정 제도화, 연체에 따른 과다한 이자부담 완화, 불합리한 추심관행 개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대출(3천만 원 미만 대상)을 연체 중인 채무자가 간편하고 신속하게 재기할 수 있도록 금융회사의 자체 채무조정을 제도화했다. 금융회사는 채무조정 요청을 받으면 추심을 중단하고 영업일 기준 10일내에 채무조정 수용 여부를 채무자에게 통지해야 한다. 채무자의 사정을 잘 아는 금융회사가 연체가 심화하기 전에 선제적이고 유연하게 지원함으로써 채무자의 신속한 재기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대출(5천만 원 미만 대상)을 연체한 채무자가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도록 과다한 연체이자 부과 방식이 개선된다. 현재는 대출금의 일부가 연체된 경우, 상환기간이 도래하지 않은 대출에도 연체이자를 부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채무자보호법」이 시행되면 대출의 일부가 연체돼 기한의 이익(기한이 도래하지 않음으로써 당사자가 얻는 이익)이 상실된 경우에도 상환기일이 도래하지 않은 원금에 대해서는 연체이자 부과가 제한된다. 이를 통해 채무자의 연체이자 부담 증가를 최소화함으로써, 채무자의 상환부담을 줄이고 경제적인 재기 가능성을 높일 전망이다.
셋째, 연체채무자가 추심 부담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과도한 추심관행을 개선한다. ‘추심 총량제’를 도입해 추심횟수는 7일간 최대 7회로 제한하며, 채무자는 특정 시간대와 추심 연락수단의 제한을 요청할 수 있고, 재난 등 불가피한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일정기간 추심 유예를 통해 과잉추심을 방지한다.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제도개선이 자칫 채무자가 정상적으로 상환할 의무가 있는 대출금을 일부러 갚지 않는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진 않을지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대출금을 연체했을 때 예상되는 채무자의 신용도 하락이나 금융거래 제약과 같은 불이익을 감안한다면 고의적으로 대출금을 연체할 유인은 낮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개인채무자보호법」은 금융회사의 자체적인 채무조정을 활성화하고 건전한 채권추심 관행을 형성함으로써 채무자가 대출금 갚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상환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소비자신용법제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영국의 경우 채무조정 활성화가 장기적으로 채권 회수율과 수익성에 도움이 된다는 금융회사들의 인식이 확산하면서 자율적인 채무조정 관행이 정착했다는 평가가 있다.
「개인채무자보호법」은 연체가 발생한 초기에 금융회사의 자체적인 채무조정을 활성화함으로써 채무자가 장기 연체의 늪에 빠지지 않고 조기에 경제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해당 법 시행으로 채무자의 권익이 보다 두텁게 보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제적인 재기 지원을 통해 더 큰 부실을 예방해 사회적 비용도 최소화하는 등 상생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도 금융위원회는 금융업권별 협회 등과 함께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내부기준에 대한 모범사례를 제공하는 등 법이 차질 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지원해 나갈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관련 전문가, 금융회사 등과 긴밀히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제도가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