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뇌장벽 투과, 뇌 신경계 역노화, 뇌 장기 유사체 등 범용성이 큰 플랫폼 기술에 투자를 강화해 타 질환군의 2배에 달하는 뇌 신경계 신약 개발의 높은 실패율을 극복하고 해외 제약사와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환자의 뇌에 칩을 심으면 어떻게 될까. 컴퓨터가 뇌파로 환자의 의도를 파악해 움직임을 로봇팔로 구현하거나 컴퓨터로 표현할 수 있다면, 사지마비 환자도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컴퓨터 작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애인의 뇌에 외부 카메라와 연결된 칩을 심는 것을 상상해 보자. 만약 카메라가 촬영하는 이미지를 눈을 거치지 않고 뇌에 직접 전달할 수 있다면 그 환자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뇌–컴퓨터 연결한 BCI 기술, 미국선 대규모 임상실험 착수…
AI·뇌 영상 기술 혁신으로 방대한 뇌 데이터 분석 가능해져
물론 이 정도의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일반인과 같은 수준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자유와 주변 세계와의 소통을 어느 정도 되찾게 해줌으로써 장애인들이 더욱 행복하고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여할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텔레파시’라는 칩셋을 척수손상 환자의 뇌에 심었다. 환자가 컴퓨터를 제어하며 독서, 게임, 온라인 수업 등 일상생활을 회복하는 임상시험에 성공했으며, 올해부터는 대규모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중국도 최근 척수손상 환자를 대상으로 세계 최초의 침습형(뇌 임플란트) BCI 의료기기 시판을 승인하며 상용화 속도에서 미국을 추월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흔히 1천억 개의 신경세포(뉴런)와 100조 개의 시냅스(뉴런 간 연결)로 구성된 초복잡계이며, 우주와 비견될 정도로 미지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오랜 기초연구 투자와 함께 최근 AI와 뇌 영상 기술 등의 혁신으로 방대한 뇌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의 성장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부는 지난 3월 18일 제44차 생명공학종합정책심의회를 개최하고 관계 부처 합동으로 ‘뇌 미래산업 국가 연구개발(R&D) 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은 앞서 설명한 BCI 기술을 비롯해 태동하고 있는 뇌 미래산업의 선도자가 될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련됐다. 국내 뇌 연구 생태계와 AI 의료, 첨단 제조(소재, 반도체 등) 역량을 총결집하는 도전적인 R&D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번 전략은 크게 5가지 핵심 과제로 구성된다. 첫째, BCI 미래산업을 육성한다. 사람 뇌에 칩셋을 이식하는 뇌 임플란트를 통해 신체 제약 극복, 뇌 질환 치료, 감각 복원 등 도전적 목표를 달성하는 7대 국민 체감 임무 중심 프로젝트 ‘브레인링크 이니셔티브’를 2027년부터 착수한다. 이는 AI와 과학기술을 결합해 국가 핵심 난제를 해결하는 범국가 프로젝트 ‘K문샷’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사업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임상 규제가 엄격한 침습형 BCI 기술의 경우 척수손상, 시각장애 등 난치 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인체에 안정적인 임상 성과를 확보한다. 규제가 덜 엄격한 비침습형 BCI 기술은 웨어러블 기기를 플랫폼으로 의료뿐 아니라 게임·영상 등 문화, 방산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조기 상용화를 추진한다. 아울러 전극, 뇌신경 신호 해독 및 변환, 뇌 신호 통신, 이식용 수술로봇 등 BCI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기술의 고도화도 병행한다.
대구, 대전·오송, 홍릉에 뇌산업 클러스터 조성하고
내년부터 뇌 데이터 확보 위한 뇌 지도 구축사업 본격 추진
둘째, 혁신적인 뇌 신경계 신약 후보 물질(파이프라인)을 창출한다. 외부 독성물질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체내 장벽인 혈액뇌장벽(Blood-Brain Barrier) 투과, 뇌 신경계 역노화, 뇌 장기 유사체(뇌 오가노이드) 등 범용성이 큰 플랫폼 기술에 투자를 강화해 타 질환군의 2배에 달하는 뇌 신경계 신약 개발의 높은 실패율을 극복하고, 해외 제약사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한다. 또한 아직 근원적 치료제가 나오지 않은 치매,?자폐,?우울 등에 대한 기초연구를 꾸준히 지원하고 임상시험 지원과 연계를 강화한다.
셋째, 기술사업화의 전진기지로서 뇌산업 산학연 클러스터를 조성한다.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대표 뇌 연구기관을 거점으로 지역의 뇌 산업 산학연 클러스터 성장을 지원할 계획이다. 한국뇌연구원(KBRI)이 소재한 대구 권역에 국내 뇌 연구 기반 인프라를 집적하고, 대전·오송 권역에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대전의 정부 출연연 및 대학과 오송 바이오산단 산학연 클러스터 간 기초연구부터 사업화까지 전 주기 협력 밸류체인을 구축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와 대학이 밀집한 홍릉은 스타트업 육성 기능을 활성화한다.
넷째, 뇌 과학과 AI 융합을 촉진하고 뇌 데이터를 확보한다. 인지·감각·운동 3대 뇌 기능에 관한 뇌파 및 뇌 이미지 데이터를 학습한 뇌 신경망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고, 장기적으로는 인간 뇌의 디지털 트윈(가상 모형)을 만든다. AI 학습에 요구되는 방대한 뇌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뇌 지도 구축사업 ‘넥스트 브레인 프로젝트’도 2027년부터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뇌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인프라와 제도를 확립한다. 영장류 등 실험동물 자원에 대한 국내 연구계의 수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국내 사육?실험 거점을 권역별로 확충하고, 장기적으로는 뇌 장기 유사체와 뇌 가상 모형을 활용해 동물실험을 대체해 나간다. 임상연구 가이드라인 마련, 부처 간 규제·진흥 협력체계 구축 등도 적극 추진한다.
앞으로는 AI를 자판이나 스마트폰이 아닌 뇌와 직접 연결해 사용하는 인간–AI 인터페이스 시대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10~20년 뒤 세상을 바꿀 K문샷의 12개 임무 중 하나인 BCI 기술에 선제적이고 과감하게 투자해 미래 기술 경쟁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