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8월 27일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국민의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위해선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뿐 아니라 퇴직연금·개인연금 등 사적연금의 역할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40년을 납입하더라도 은퇴 전 소득의 40~50% 수준밖에 받지 못하는 국민연금으로는 노후소득을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이 사적연금을 통해 보다 넉넉한 노후소득을 마련하도록 돕는 것이 대책의 주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는 고용노동부·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 및 연구기관과 함께 사적연금 활성화 TF를 운영하고, 여기에서 연금의 가입·운용·수령 전 단계에 걸쳐 법·제도·금융·재정·세제를 아우르는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이번 대책은 여러 부처와 연구기관 간 협업을 통해 개별부처 단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획기적 방안들을 포함했다. 그간 많은 연금전문가와 연구기관에서 제안했던 과제들이 사실상 거의 모두 포함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6년부터 단계적 적용, 1년 미만 비정규직도 퇴직연금,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제도’ 도입
먼저 가장 큰 변화는 전체 사업장의 퇴직연금 의무화다. 퇴직연금제도는 2005년 기존의 법정 퇴직금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됐으나,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사업장 도입률이 16%에 불과하다. 특히 퇴직금 체불 가능성이 높은 30인 미만 영세사업장의 도입률이 14%로 저조한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모든 사업장에 대해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다만 기업 부담을 고려해 2016년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기업 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10인 미만 사업장은 영세성을 고려해 2022년까지 충분한 준비기간을 허용했다. 기한 내에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는 기업에는 과태료 등 벌칙을 부과해 최소한의 이행력을 확보하기로 했다. 대상 사업장 확대와 더불어 근속기간 1년 미만 근로자(주로 계약직)는 퇴직금 지급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현행 규정을 개정해 일정기간 이상 근무한 경우 누구나 퇴직금 또는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할 예정이다.
30인 이하 영세사업장은 2015년 7월 도입되는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제도’를 통해 퇴직연금제도의 운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모아 기금을 구성하고, 노·사·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가 자산을 운용한다. 기금에 가입하는 사업주에게는 3년간 저소득 근로자 퇴직연금 적립금 10%와 운용수수료(적립금의 0.4%)의 절반을 재정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의 도입이다. 현재 퇴직연금제도는 기업과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업무에 관한 계약을 체결해 연금자산을 운용·관리하는 계약형만 존재한다. 그러나 2016년 7월부터는 기업이 회사 밖에 기금을 설립하고 퇴직연금 적립금을 기금에 신탁·운용할 수 있게 된다. 기금형이 미국·호주 등에서는 일반화된 제도지만 우리나라에선 처음 도입되는 점을 감안해, 우선 대규모 단일 기업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은 기금형의 일종이나, 근로복지공단이 주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 기금형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기금형 도입과 함께 기존 계약형 제도의 개선도 추진한다. 먼저 확정급여형(DB)을 도입한 기업의 합리적 자산운용을 유도하기 위해 노·사·전문가가 참여하는 투자위원회 구성 및 투자원칙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한다. 도입 필요성과 기업 부담능력을 고려해 2016년 500인 이상 기업부터 2018년 100인 이상 기업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또한 확정기여형(DC)의 경우 표준형 DC제도를 활성화해 영세기업들이 연합해 DC형 퇴직연금을 공동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퇴직연금 자산운용 시 안정성과 수익성을 균형 있게 추구할 수 있도록 규제가 대폭 완화되는 것도 획기적 변화다.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의 총위험자산 보유한도를 40%에서 70%로 높여 기업이 운용하는 DB형과 동일하게 조정한다. 또한 총위험자산 투자한도(70%)만 남기고 개별 위험자산 투자한도는 원칙적으로 폐지함으로써 복잡한 규제를 단순화하되, 파생상품·실물자산·주식 등 위험도가 큰 자산에 대한 규제는 남겨 놓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퇴직연금 투자권유준칙 등 소비자 보호장치 마련
이러한 여러 가지 큰 변화에 대응해 근로자들이 안정적으로 자산을 운용할 수 있도록 보호방안도 마련했다. 먼저 퇴직연금 투자권유준칙 도입, 손익상황 통보, 중장기 누적수익률 공시 의무화 등 연금 판매·운용·공시 전 단계를 포괄하는 소비자 보호장치를 마련할 예정이다. 또한 DB형 도입 기업의 의무 사외적립비율을 현재 70%에서 2020년 이후 100%까지 높여 기업이 파산하더라도 근로자가 안전하게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DC형·IRP 적립금에 대해선 기존 예금자 보호한도에 추가로 금융기관별 1인당 5천만원까지 예금자 보호한도를 적용할 예정이다.
사적연금의 장기보유·유지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퇴직연금자산을 담보로 한 대출상품을 개발해 일시 목돈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대출 사유도 확대해 학자금·긴급생계비 등을 위한 대출도 가능하도록 할 예정이다. 부득이한 사유로 인한 중도인출 시에는 낮은 세율을 적용받게 된다. 개인연45금을 장기 보유하는 가입자에게는 운용수수료를 할인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세제개편도 추진한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가입 후 이직·퇴직 시 일시금 또는 연금(매월 일정액)으로 수령할 수 있는데, 안정적인 노후소득 마련을 유도하기 위해 연금으로 수령 시에는 일시금 수령 시보다 세금을 30% 덜 내도록 했다. 또한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사용자가 적립한 부담금을 재원으로 하고 근로자가 추가로 납입하는 경우 개인연금 납입액과 합쳐 400만원까지 세액공제(12%) 해주고 있는데, 내년부터는 퇴직연금에 대해선 300만원까지 추가로 공제해줄 예정이다.
아울러 개인연금에 대해선 가입자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상품이 출시될 예정이다. 가입자와 금융회사 간 사전약정에 따라 금융회사에 운용상 재량을 부여하는 위탁운용형 상품, 고령자를 대상으로 사망보험금을 연금으로 지급하는 사망보험금 선지급 상품 등이다. 또한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개인연금 관련 법률을 통합 규정하는 ‘개인연금법’ 제정이 추진된다.
이번 대책이 예정대로 추진될 경우 2022년까지 현재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은 140만여개 사업장이 퇴직연금을 도입해야 한다. 상시근로자 약 530만명이 새로 퇴직연금에 가입하게 되고, 근속기간 1년 미만 근로자 100만명 중 상당수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현재 연간 4~5천억원 수준인 퇴직금 체불사례가 크게 줄어들고,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