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경제』가 창간된 1990년,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사건은 단연 독일 통일일 것이다. 그해 10월 3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독일 대통령은 베를린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독일 통일을 공식 선포했다. 우리에겐 지금도 어렵게만 보이는 통일을 30년 전에 이룬 독일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30년이 지난 지금 독일인들은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등의 많은 질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30년 전 현지에서 독일 통일을 경험하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지난 15여 년에 걸쳐 대북 협력사업을 해온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를 만나 이런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30년 전 독일 통일 당시를 기억하나.
독일 통일은 예기치 않게 이뤄졌다. “통일이 되겠지만 내 생전에 볼 순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아버지는 통일 3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계시다. 동독에 친척이 많이 살았는데, 통일이 되면서 동독 친척들이 자유롭게 서독에 사는 우리를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광장히 행복한 경험이었다. 통일이 공식 선언된 1990년 10월 3일에는 군 복무 중이라 베를린에 가진 못했다. 그때 직접 가서 사진 등 기록을 많이 남겨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한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약 1년이 지난 때여서 축제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고 경제난 등에 대한 우려가 막 제기되는 시기였지만, 통일은 나를 비롯한 독일인들에게 아주 기쁜 일이었다.
무엇이 통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나.
붕괴하고 있던 사회주의 경제체제, 동유럽 국가들의 개방 분위기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렸다. 또한 1975년 헬싱키 협정을 계기로 설립되고 동유럽 국가들도 가입돼 있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동독 내 인권 및 기본적 자유를 독려하면서 동독의 자유화 움직임의 기반이 마련됐다. 무엇보다도 라이프치히 등에서 통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를 벌인 동독인들의 용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등을 상대로 독일 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장·단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독일 정부는 동서독 격차를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먼저 대학 개선·신설 정책을 꼽을 수 있다. 한 예로 동베를린 지역에 위치한 훔볼트대에 인력 지원 및 학과 신설 등 대학 개선작업을 함으로써 질 높은 공공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해당 지역에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두 번째는 산업정책을 들 수 있다. 통일 전 동독 지역 산업생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부나-로이나-비터펠트 화학산업 삼각지대는 인프라 등이 많이 노후화돼 있었는데,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경쟁력을 높였다. 작센주에 조성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클러스터도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동서독 노동자들에게 동일 임금을 지급한 정책은 단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일정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통일 30년이 지난 지금 독일인들은 통일 결과에 만족하나.
최근 여론조사에서 구 동서독 지역 모두 유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독일 국민의 약 60%가 통일로 인해 행복하거나 매우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약 30%는 중립이었고, 10% 정도는 불행하다고 답했으며, 1~2% 정도는 매우 불행하다고 답했다. 통일로 권력을 잃은 세력 등 소수를 제외하고 독일 국민 대다수는 통일은 정말로 큰 선물이었고 독일의 성장에 좋은 기회가 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통일 후 독일은 더 큰 나라가 됐고 기대수명, 삶의 질과 같은 사회 지표들도 모두 크게 개선됐다. 지금 우리 재단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독일 젊은이의 경우 동독 출신인지 서독 출신인지를 묻는 질문 자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동독에 위치한 기업 본사 수가 더 적은 등의 격차가 여전히 있지만, 이것은 동서독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역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0년 전 동서독 관계와 지금 남북한 관계에 차이가 있다면.
30년 전 동서독에 비해 지금 남북한은 교류·협력이 미미하다.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신뢰가 쌓여야 하는데, 이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협력 등 행동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의 경우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여러 번 마련했었는데, 그때 그런 부분을 느꼈다. 탈북자들조차도 남한에서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고 사회에 잘 통합되지 못하는 느낌이다.
남북 교류·협력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을까.
다양한 민간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국가 기밀, 무기, 최첨단 기술 등과 관련된 소수의 사안을 제외한 민간교류는 통제할 이유가 없다. 일례로 독일 통일 전 동독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할 때 서독 정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대북 민간교류를 다 허용한다 해도 그것이 당장에 전부 실현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다. 북한 웹사이트, 신문 등도 차단할 필요가 없다. 터무니없는 내용의 노동신문을 읽는다고 공산주의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남한이 스스로 더욱 자신감을 갖고 개방할 필요가 있다. 탈북자들에 대해서도 남한으로 오는 것을 환영하면서도 언제든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는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서독의 경우도 동독인들에 대해 그런 접근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교류가 가능할까.
형식적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북한 교회와 접촉할 수도 있고, 절을 지어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북한 불교계와 교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동베를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필수 교과였다. 그런 방문이 남북 간에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자유화한다고 해서 당장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뢰 구축을 위한 강력한 신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교류가 불가능한 것은 많은 부분 「국가보안법」 등 한국 법 때문이고, 부분적으로 국제적인 대북제재 때문이다. 국제제재도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우선은 한국이 북한과의 모든 접촉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통일보다는 남북한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남북한의 평화로운 공존은 통일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다. 평화로운 공존 없이 신뢰가 쌓이긴 어렵다. 서독에서도 통일보다는 평화적으로 함께 사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졌다. 독일 통일 당시 독일인들은 통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모든 비정치적 진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 순조롭게 이뤄졌고 통일이 왔다. 한국도 지금은 통일이 요원해 보이고 실제로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지만,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는 만큼 미리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 한국은 통일의 비용을 치러야겠지만, 장기적으로 군사비용 절감, 시장 접근성 제고, 인구 및 부동산 문제 해결 등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통일은 북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중장기적으로 남한에도 좋은 비즈니스다.
앞으로의 계획은.
대북 경제 프로젝트가 국제제재 등으로 어려워져 지금은 재조림사업, 습지 보호 등 북한의 생태 회복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마지막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후 코로나19로 사업이 잠시 중단된 상황으로, 최소 내년 여름은 돼야 재개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속적인 대북 환경사업을 통해 북한의 지속 가능한 환경 조성과 국제협력 강화, 나아가 한반도 갈등 완화에 기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