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광의의 베이비부머는 1세대(1955~1964년생) 780만 명, 2세대(1968~1974년생) 623만 명, 두 기간 사이에 출생한 248만 명을 모두 합쳐 1,7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전체 국민의 3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인구집단인 셈이다.
베이비부머 1세대는 대체로 농촌 출신으로 소위 소 팔고 땅 팔아 보다 나은 교육 기회, 보다 좋은 직업 기회를 얻기 위해 이촌향도(離村向都)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에 비해 고학력, 고숙련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이도향촌’해 그간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농촌을 위해 활용한다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고학력·고숙련층인 베이비부머의 귀농·귀촌은
과밀한 도시와 소멸하는 농촌 모두 살릴 대안
우리 농촌은 인구의 극심한 과소화로 소멸위험까지 거론되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 서울 등 대도시는 인구 집중으로 집값 상승, 일자리 부족, 교통 혼잡 등이 심화되고 있다. 농촌이나 도시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부담과 비용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사는 베이비부머의 귀농·귀촌이 활발해진다면 농촌과 도시를 모두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당연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기대만큼 수요도 꽤 충분해 보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19살 이상 국민 중에서 삶의 ‘버킷리스트’를 농촌에서 실현해 보기를 원하는 이들은 970만 명에 달한다. 5년 이내 농촌에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이미 준비에 돌입한 도시민은 무려 485만5천 명으로 추정됐다. 이 중에서 50대 이상은 266만7천 명으로 55%를 차지한다.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던 ‘이촌향도’와 정반대로, ‘이도향촌’의 흐름을 만들 토대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산업화 시기의 농촌은 국가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식량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농촌은 은퇴 세대를 위한 전원의 삶, 일·여가의 새로운 소비공간으로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농업의 지속가능성 제고는 물론 농촌의 정주여건 개선을 통해 지역사회의 활력을 높여 주는 핵심공간으로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버킷리스트 실천 무대로서 잠재력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귀농·귀촌 인구는 매년 50만 명에 육박한다. 이 중 ‘귀농’ 인구는 2~3%에 그치고, 대부분은 농촌에서 살고 일하고 즐기려는 ‘귀촌’ 인구에 해당한다. 베이비부머 귀농·귀촌인은 오랜 기간 생활했던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 일, 여가 등을 위한 인생 이모작 공간으로 농촌이라는 낯선 환경을 선택했다. 귀농인과 귀촌인의 농촌에 대한 구체적 기대와 수요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에 적합한 획기적인 지원대책도 필요할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귀농·귀촌이 활성화되는 데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선, 집을 구하는 일이 녹록지 않다. 농촌에 빈집이 많다고는 하나 막상 들어가 살 만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도시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농촌에 새집을 짓기는 부담이 크다.
둘째, 농촌은 도시와 비교해 의료시설이 현저히 부족하다. 특히 고령자들을 위한 의료서비스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베이비부머의 귀농·귀촌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셋째, 문화여가 시설과 서비스도 충분치 않다. 지방의 문화여가 인프라는 대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악하다. 농촌의 문화여가 프로그램 역시 도시에 비해 다채롭지 못하며 서비스의 질도 낮다. 설상가상으로 농촌에는 함께 문화여가 생활을 향유할 친구들이 많지 않은 데다 기존 주민들의 텃세와 갈등도 걱정스럽다.
넷째, 일자리도 문제다. 귀농·귀촌인이라면 당연히 일자리는 농사짓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귀농·귀촌 후 농사짓기를 선택하는 것과 농사지을 것을 강제당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현재 농촌에는 농사 외에 베이비부머의 일자리 선택지가 많지 않다. ‘이도향촌’해 오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고학력·고숙련자들이다. 이러한 인적자원을 방치하는 것은 농촌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앞으로는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은퇴(retire)는 말 그대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re-tire)’ 새로운 출발점이 돼야 한다.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 발전의 동력이 됐던 베이비부머 세대의 새로운 인생 이모작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그들의 귀농·귀촌을 응원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곧 도시와 농촌 모두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지방거점병원의 응급의료 인프라 정비에 집중하고
베이비부머에 적합한 교육·일자리 만들어 연계할 필요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농촌 주택을 보다 쉽게 마련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세제 감면, 기초연금에 대한 지자체의 부담 경감, 지방 의료 인프라 및 서비스 혁신 등 획기적인 정책을 다양하게 검토할 수 있다. 특히 의료 인프라는 지방거점병원의 오프라인 응급의료 인프라 정비에 집중하는 한편 상시 의료서비스를 ICT 첨단기술을 활용한 원격의료서비스로 전환해 감으로써 도시보다 우선해 ‘거리(distance)의 소멸’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전원지역으로서 매력적인 농촌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난개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자체 차원에서는 베이비부머를 자신의 지역으로 유치할 수 있도록 실버 세대 맞춤형 주택단지를 만들고, 문화여가 프로그램들을 섬세하게 정비하며, 베이비부머에게 적합한 교육과 일자리를 만들고 연계해야 한다. 농촌에는 도시에서의 경험을 축적한 베이비부머들이 참여할 다양한 기회가 존재함에도 막상 이를 발굴, 연계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적지 않은 농촌 마을에서 귀농·귀촌인이 이장, 사무장 역할을 하는 경우나 귀농·귀촌인이 거점이 돼 도시와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비즈니스로 성과를 내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베이비부머들의 귀농·귀촌이 더 나은 삶의 공간,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을 창출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농촌의 활력 증진을 견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베이비부머들의 농촌 귀환이 그들의 버킷리스트 실현, 행복한 삶의 유효한 대안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