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춘옥은 엄마처럼 해녀의 삶을 사는 대신 공부를 하고 싶었다. 4.3 사건 당시 경찰서로 잡혀간 오빠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네와 제주를 살기 좋은 터전으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제주에서는 여성이 물질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고 남성이 집안을 돌보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렇게 그는 눈물을 훔치며 7살에 수영하는 법을 배워 8살에 미역을 잡고, 12살에 상군 해녀(최대 20미터까지 잠수하는 해녀)가 돼 15살에는 노를 저어 먼바다로 나가 물질을 했다. 어른이 된 춘옥은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이 넷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차가운 바다에 몸을 몇 번이고 던졌다. 제주 구좌읍 종달리에서 태어난 86세 최고령 해녀 춘옥의 실제 이야기다.
당연하다 여겼던 삶인데 내 이야기를 누군가 귀 기울여 듣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위로받는다. 해녀와 지역에 대한 관심과 존경이 담뿍 담긴 공연과 식사였다. 어떻게 ‘해녀다이닝’이란 콘셉트로 풀어낼 생각을 했을까? 해녀의 부엌을 창업한 김하원 대표를 만나 공연의 여운을 좀 더 이어가 보기로 했다.
제주 뿔소라시장 문제에서 출발한 ‘해녀를 위한’ 공간
해녀의 부엌은 제주해녀와 청년예술가들이 해녀의 문화를 음식으로 풀어내는 팀이다. 해녀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 및 실사영상물이 결합된 다이닝 운영뿐 아니라 해녀의 음식문화가 담긴 콘텐츠를 개발해 육지에서 팝업 전시공연과 체험형 프로그램을 열고,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로 가공식품을 유통·판매하는 등 해녀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를 다방면으로 풀어내고 있다.
해녀의 부엌 건물은 해녀와 어부들이 제주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경매하고 판매하던 어판장이었다. 해녀의 부엌 본점이 종달리에 자리 잡게 된 데는 김 대표의 영향이 컸다. 이곳 종달리에서 태어나 대대로 해녀로 살아온 가족에게서 자란 김 대표에게 이 공간은 그의 역사 그 자체였다.
어촌인구가 감소하면서 해산물 판매가 줄어 몇십 년간 방치돼 남아 있던 이 창고가 어릴 적에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은 공간에 예술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해녀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 공간을 쓰던 해녀들의 모습이 내 감각에 저장돼 있을 거라 믿었기에 그 감각을 가장 잘 끌어낼 수 있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이곳에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왜 ‘해녀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까? 2016년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제주해녀의 문화가 등재됐을 당시 해녀와 관련된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주해녀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저 모습이 다가 아닌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나라면 해녀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면서 지역에 선순환을 가져오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품게 됐다.
좀 더 직접적인 계기는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알게 된 제주 해산물시장의 속사정 때문이었다. 제주 뿔소라의 경우 80%가 일본으로 수출된다. 판로가 다양하지 못하다 보니 가격주도권을 가진 일본 수입업체가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인 데다 지속된 엔저 등으로 20년 전보다 가격이 하락하고 있었고, 물량도 줄어 해녀들의 일거리도 감소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수시장 형성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생산자들의 연령대를 고려했을 때 물리적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지역의 힘, 특히 청년의 힘이 필요했고, “우리 가족, 우리 동네의 일이기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자 본업이었던 ‘예술’로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다. 해녀를 위한 공간을 연출하고, 그들의 삶을 무대로 올려 해녀와 관객 모두를 치유하고자 했다. 또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 ‘제주’ 하면 식도락이다.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로 해녀들이 직접 그들의 음식을 만들어 육지사람들에게 선보여 보자! 그렇게 새로운 판로를 연다는 계획이었다. 식당과 공연장이라는 정형화된 공간, 그 경계를 무너뜨려 ‘해녀다이닝’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게 된 건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바다가 뭐냐고? 뭐긴 우리 부엌이지”
지금까지 해녀들로부터 산 해산물이 50톤 정도. 시중의 가격보다 높게 구입했고, 수입의 일부를 어촌계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해녀의 부엌에는 마을 해녀 12명과 청년예술가 12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렇게 해녀의 부엌은 고령에도 여전히 물질하는 해녀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되기도 한다.
해녀의 부엌은 어촌마을의 활력을 불어넣는 기특한 손주 역할도 하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녀의 부엌 앞으로 버스정류장도 생기고 가로등도 들어오고, 주변에 가게들도 생겼다”며 웃던 김 대표는 “원래 종달리는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는 마을이었는데, 요즘엔 종달리에서 묵는 숙박객이나 동네 가게를 찾아오는 여행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답했다. 가끔은 마을에서 길을 헤매는 관광객이 보이면 마을 어르신들이 해녀의 부엌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고.
마을의 자랑거리인 해녀의 부엌이 종달리에 자리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을까. “어디서도 보지 못한 콘셉트의 로컬비즈니스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에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렇지만 ‘이 청년들이 식당을 하겠다는 건지 해산물을 팔겠다는 건지 공연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어르신들 앞에서 우리의 언어 말고 이들의 언어로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들을 초대해 창고를 하루 빌려 앞으로 이 공간에서 하려는 일과 벌어질 일들을 직접 보여드렸다.” 그때의 일을 영상·사진으로 기록해 지자체에 보냈다. 그렇게 마을과 지역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둘 힘을 합쳐 해녀의 부엌이 만들어졌다.
해녀의 부엌 청년들이 만든 해녀 이야기는 총 다섯 편. 해녀와 한 달간 인터뷰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연을 구성할지 결정한다. 관객들이 ‘해녀들의 바다에 대한 태도와 공동체 정신’을 느꼈으면 한다는 김 대표. 그는 “산소통 없이 자신이 가진 숨만으로 바다가 허락하는 만큼 해산물을 채취하고, 미역값이 높던 시절 미역 채취 구역을 정해 ‘학교 바당(제주어로 바다)’이라 부르며 그곳에서 채취해 판 수익을 마을 학교를 짓는 데 쓰는 이 이야기가 육지사람에게 가닿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무대에 올리기 전 주인공인 해녀와 가족을 초대해 그들 앞에서 먼저 공연을 한다. 이 이야기를 올려도 될지 허락받기 위해서다. 김 대표는 “내 인생이 창피한 인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 잘 살아왔네”라며 오열을 터뜨리는 어르신과 “모든 사람이 해녀의 부엌에 와 치유와 위로의 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랬듯이.”라는 감상평을 남긴 관람객을 통해 공연이 가진 치유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김 대표는 “제주 시골마을에서 시작하는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톳밥, 전복물회, 뿔소라 꼬치, 군소무침 등 제주의 음식에는 해녀의 문화가 담겨 있다. 제주의 대부분 엄마가 해녀였기에 음식에 해녀의 삶 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며 이 매력적인 콘텐츠를 전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 해녀 공연이 열리고, 많은 사람을 제주로 찾아오게 하는 모습을 꿈꾸고 있다는 그는 요즘 해외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실제로 관람객 10명 중 1명은 외국인이기도 하다. 우선은 거리상 가깝고 문화, 정서가 비슷한 아시아권에서 첫걸음을 뗄 계획이다.
‘숨비소리’는 해녀가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참아온 숨을 물 위에서 고를 때 내는 소리다. 머지않아 사라지고 잊혀질 위기에 처한 제주 숨비소리를 해녀의 부엌이 예술로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