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이해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고령화 수준(노인인구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37개 OECD 회원국 중에서 29번째 정도인데, 비서구권 국가들(멕시코, 칠레, 이스라엘 등)과 유럽의 인구소국들(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을 제외하면 사실 OECD에서 가장 젊은 나라에 가깝다. 그런데도 왜 고령화, 고령화 하면서 호들갑일까?
문제는 속도다. 우리나라는 2050년경이 되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나이 든 나라가 된다. 그때 노인인구 비율은 40%가 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고령화 수준이 가장 높은 지자체인 경북 의성(44.3%), 전남 고흥(43.2%), 대구 군위(43.1%)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초고령화의 파장은 ‘이미 정해진 미래’
2023년에 베이비부머의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58년 개띠’ 인구가 65세 노인기에 진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82년까지 30여 년 동안 거의 매년 80만 명 이상이 태어났다(사실 1, 2차 베이비부머를 정의하는 기준은 우리 인구변동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거대한 인구 코호트(같은 시기를 살아가면서 특정한 사건을 함께 겪은 집단)가 계속해서 노인기로 들어가지만, 이를 받쳐주는 젊은 세대는 저출산의 영향으로계속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빠르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초고령화의 파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노인인구가 지금보다 좀 많아져 생활이 조금 불편해지고, 세금이 조금 늘어가는 정도로 이해돼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의 고령화는 출생아 수 감소가 누적된 현상이고, 고령화가 빠른 이유는 저출산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급격한 고령화는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이고, 우리가 맞이하게 될 불가피한 파장이다.
우리 사회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인구에 대한 오해는 ‘인구감소는 나쁘지 않다는 믿음’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인구감소는 경쟁을 낮추고, 집값을 안정시키고, 지구환경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이런 믿음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단지 사람 수가 줄어드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우리의 인구감소는 노인인구가 크게 늘고 젊은 인구는 급속하게 줄면서 사망자가 출생자를 압도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인구감소는 인구 고령화의 한 현상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인구감소 사회의 축복’ 운운은 인구에 대한 안일한 생각과 낮은 이해를 보여준다.
위기적 저출산이 시작된 2002년에는 대학 입학정원보다 적은, 50만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는 우리가 이미 19년 전에 2021학년도 지방대 대량 미달 사태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에는 수도권 대학의 입학정원보다 적은 25만 명이 태어났지만, 우리는 또다시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인구 고령화와 인구감소가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는 산업·국방·교육·문화 각 영역에서 체제전환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사회의 격차와 불평등은 계층과 지역과 세대를 따라 더 심화하고 이해당사자들 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문제의 핵심인 저출산을 이해하는 데 경제학적 프레임에 크게 의지한 측면이 있다. 출산과 양육의 총비용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이 총비용이 증가해 출산율이 낮아지는데 반대로 이를 줄여준다면 출산율은 다시 오를 것’이라는 논리다. 이에 따라 총비용 감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저출산정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원사업들이 만들어졌고, 그러면서 “280조 원을 쏟아붓고도 효과가 없다”는 타박도 듣게 됐다. 이 논리에는 중요한 가정이 전제돼 있는데, 바로 출산과 가족에 대한 수요(효용성)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집중, 청년 생애과정, 가족 행복, 경쟁체제 등이
저출산의 새로운 담론으로 등장
그런데 연구과정에서 청년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이 수요가 확연히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한다. 그 원인은 경제적 부담 이상의 것들인데, 왜냐하면 좋은 직장을 갖고 주거가 마련된 이들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널리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청년들은 1990년대 말 소위 ‘IMF 경제위기’ 이후 사교육 경쟁과 빈곤층으로의 추락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아이는 공부만 하고, 엄마는 뒷바라지하고, 아빠는 돈 벌어오는 것이 가족의 일상이 돼버렸고, 대한민국의 가족은 높은 연봉과 값 오른 아파트 그리고 입시에 성공한 자녀를 가장 중요한 ‘성공한 가족 모델’로 여기고 달려왔다. 이 속에서 우리의 청년들은 가족 간 정서적 친밀성이나 행복한 가족의 가치를 실제 경험 속에서 느끼지 못하고 성장했으니, 오늘날 이들이 가족과 출산에 대한 수요가 낮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취업난과 주거난의 구조적 어려움을 마주해야 하고, 설사 좋은 일자리와 집을 얻게 돼도 부모세대처럼 자신과 아이의 삶을 사교육에 ‘갈아 넣기’를 거부하고자 출산 자체를 포기한다. 거시적 차원에서는 수도권 집중은 서울과 지방 모두에서 청년 삶을 곤궁하게 하고, 하나의 가치에 줄 세우는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다.
설사 운이 좋아 가족을 이뤄 아이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출퇴근 시간을 포함한) 장시간 노동 속에서 아이와 가족을 돌보기 힘겨워하고, 특히 엄마들은 (아이를 낳았다는 죄로) 경력단절의 압박과 눈총 속에서 집과 직장 사이를 숨 가쁘게 뛰어다닌다. 그러다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사교육 전장으로의 출정을 준비한다.
이 모두를 요약하자면 ‘대한민국의 가족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상황과 경험들이 청년들 각 코호트에 녹아들어 지금의 거대한 저출산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저출산의 문제가 경제적 비용을 (조금) 낮춰주는 지원정책과 사업들로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저출산 구조가 정부의 탓만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가 개입하고 참여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최근 대중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제는 언론기사에서 “지원 사업과 예산을 확대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전문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수도권 집중, 청년 생애과정, 가족 행복, 경쟁체제, 미래 불확실성, 기성세대의 양보 등과 같은 새로운 담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새로운 이야기들은 왜 이제야 등장하는 것일까? 필자는 전문가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저출산 문제를 노동력 부족, 경제성장 둔화 등 ‘나라 경제’의 문제로 한정 짓고, 정부 부처들과 함께 (자기 영역의) 개별 사업들을 늘리려는 전문가들이 논의를 주도했다. 인구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만 해결하면 된다”는 자기주장을 반복했고, 심지어 유사 인구전문가들이 인터넷뿐 아니라 공중파에까지 나와 공론을 왜곡한다.
지금의 극단적 인구변동과 그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파장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원사업도 꾸준히 계속돼야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뿐 아니라 기업·시민사회·지역사회 등 민간 영역에서도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인구에 대한 논의가 고도화돼야 더 발전된 대응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