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이 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됐을까? 그 이유는 바로 사회구조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젠더 질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예전에는 ‘남성=유급노동을 통한 생계부양, 여성=아동양육과 가족돌봄’이라는 성별분업이 사회규범이었으나, 지금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노동시장에 나가서 일을 하는 사회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누구도 여성이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 일만 하는 것을 생애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 우리나라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2005년 이후 남성을 앞질렀고, 2021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서도 85.2%의 국민이 여성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표준으로 삼는 이 같은 인식은 젊은 세대에서 더욱 압도적이다.
그런데 통계청의 2021년 지역별 고용조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맞벌이 비율은 46.3%에 불과하다. 여성 고용률은 20대 후반 70%를 넘지만 30대 이후 결혼-출산-양육기를 거치면서 급강하하다 40대가 되고서야 다시 올라가는 M자형 구조가 아직도 공고하다. 여성들이 일을 하고 경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해도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긴 노동시간과 경직된 기업환경 때문에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시기에 원치 않는 퇴사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일·가정 양립이 어려워 출산을 최대한 지연하고 최소화하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기쁨이고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되고 경력을 포기해야 하는 징벌이 되는 현상을 사회학자들은 모성패널티(motherhood penalty)라고 명명하고 있다. 취업면접에서 결혼하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성차별적 질문에 ‘제가 알아서 잘해 회사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겠다’ 아니면 ‘부모님 도움을 받아서 문제없도록 하겠다’라고 응답했던 예전 세대와 달리 ‘아이를 낳지 않을 예정이다’라는 답변을 내놓는 슬픈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은 결국 저출산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남녀 고용평등을 실현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고 저출생을 극복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마련한 일·가정 양립정책은 성평등 의식을 반영하지 못함에 따라 정책의 실효성이 낮은 게 현실이다. 2023년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남성 육아휴직자는 3만7,800명으로 3년 전보다 1.7배 늘어났다. 그러나 여성 육아휴직자는 같은 해 남성 육아휴직자 대비 2.5배나 많은 9만3천 명으로, 여전히 육아와 가사는 여성의 몫이며 남성의 육아휴직은 특별한 일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현행 일·가정 양립정책은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과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의 삶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가사노동을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 일과 가정생활을 모두 잘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주변의 눈치 보지 않고, 경력단절에 대한 불안과 소득 감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몸은 힘들지만) 충분히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겠다’는 미래 전망이 있어야만 젊은 세대는 지금과는 다른 선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차원적인 제도 개편에서 벗어나 사회·문화 현상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일·가정 양립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심도 깊은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