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활 균형은 처음으로 공적 담론에 등장했던 1960년대 이후 시기에 따라, 해당 사회의 정책적 지형과 현안의 특성에 따라, 핵심 어젠다와 정책 담론이 변화하고 확장돼 왔다. 예컨대 1970년대 유럽에서는 일·생활 균형정책이 돌봄과 일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한 사회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보다 개인주의적이고 기업의 경쟁력 담론과 밀접하게 결합된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2019년에는 EU 이사회가 ‘사회권을 위한 20개 기둥’ 중 아홉 번째 기둥으로 일·생활 균형을 포함하면서 일·생활 균형이 보편적 사회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자녀 양육 부담으로 발생하는 근무상 어려움을 개인이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일·생활 균형정책은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포함돼 있을 만큼 초저출생이라는 독특한 사회적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생활 균형정책이 출산주의 정책 프레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궁금한 것은 일·생활 균형정책을 통해 20년째 지속되고 있는 저출산의 깊은 계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기존 연구들을 종합해볼 때 그럴 수 있지만, 그러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일·가정 양립정책이 출산휴가·육아휴직 등 휴직 관련 제도로 축소돼선 안 된다. 일·가정 양립정책이라는 마차 바퀴의 한 축이 출산 및 육아기의 휴가와 휴직제도라면, 다른 한 축은 일상의 삶에서 일과 가정생활의 만족스러운 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정책 수단들로는 유연근무제, 육아기 근로자들의 단축근무를 포함한 근로시간 조정 요구권, 가족돌봄 근로자 차별 금지 등 다양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일·가정양립정책에서 이 두 번째 바퀴는 매우 왜소했다. 불균형한 바퀴를 가진 마차가 잘 굴러갈 리 없다.
2023년 11월 16일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의5에 명시된 ‘자녀 양육 근로자에 대한 근로시간 조정 배려의 의무’에 대한 해석을 살린 대법원 판결(2019 두 59349)은 일상에서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 기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만들 수 있는 귀중한 판결이다. 1세, 6세 자녀를 양육하는 워킹맘에게 ‘수습기간 동안 새벽근무 및 공휴일 근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업이 본채용 거부를 통보한 데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 다투는 재판에서, 대법원은 본채용 거부를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으로 발생하는 근무상 어려움을 육아기 근로자 개인이 전적으로 감당하여야 한다고 볼 수 없고, 사업주는 그 소속 육아기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배려의무를 부담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사업주가 그 소속 육아기 근로자에 대하여 근로시간 등에서 배려하는 것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의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단비 같은 이 판결을 풍부하게 해석하는 후속조치들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일하는 문화가 일상의 일·가정 양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둘째, 일·가정 양립정책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합계출산율의 급락에 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함의가 있는 또 다른 현상이 있다. 최근 코호트(같은 시기를 살아가면서 특정한 사건을 함께 겪은 집단)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경제적 계층 간 출산율 차이의 변화 양상이다. 특히 1980년대생 코호트부터 저학력과 저소득 분위에서 출산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많은 사회복지정책학 연구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2000년대 이후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복지정책의 기틀을 짜면서 취약계층보다는 오히려 안정된 일자리의 노동자들에게 복지가 집중되는 ‘역진적 선별성’과 함께 노동시장에서의 격차가 복지 격차로 나타나는 ‘이중 격차’의 문제를 안게 됐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은 고용안정성과 임금이 높을 뿐만 아니라 기업 내 일·가정 양립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고 고용보험 기반의 출산휴가·육아휴직 등 공적 가족정책에 대한 접근도 쉽다. 반면에 중소기업 일자리, 비정규직, 프리랜서, 비임금근로 부문은 고용안정성과 임금도 낮지만 기업 내 일·가정 양립제도가 부재한 경우가 허다하고 고용보험제도 밖에 있는 경우도 많다. 이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일·가정 양립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전략이 달라질 수 있음을 함의한다.
실제로 출산휴가,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등 기본적인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들도 기업 규모에 따라 활용률에 큰 차이가 있다. 2021년 기준 자녀를 출산한 여성근로자의 65.2%가 육아휴직을 사용했으나 기업체 규모별로 편차가 매우 컸다. 300명 이상 대기업은 제도 대상 여성근로자의 76.6%가 육아휴직을 사용한 반면, 50인 미만 기업의 여성근로자는 육아휴직 사용률이 50%에 미치지 못했다. 2021년 기준 남성 육아휴직 활용률은 300인 이상 기업체의 경우 6.0%, 50인 미만의 경우 3%에 그치고 있다.
기혼 여성의 경제력과 출산 간 양의 상관관계는
대부분 모성보호제도 접근성 차이 때문
영유아 돌봄서비스 이용에서 계층 간 격차 문제는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다수의 연구가 저소득층의 경우 돌봄서비스의 구매, 공공돌봄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제약돼 소득이 낮을수록 돌봄 부담이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1999~2016년 기간의 연간 가구 데이터를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2006년 이후 기혼 여성의 경제력과 출산 간에 양(+)의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소득집단 간 출산 확률 차이의 대부분은 모성보호제도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좋은 소식은 출산 지원책으로써의 일·가정 양립 지원정책이 제한적으로나마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책의 계층 형평성을 높일 때 더 가시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생활 균형정책은 규범적 변화를 촉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최근 『인구개발리뷰(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저널에 실린 한 연구는 국가간 비교를 통해 여성이 일을 하는 건 좋지만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강한 사회일수록 아이를 기쁨보다는 무거운 짐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한국은 조사 대상 국가 중 ‘여성의 경제활동을 지지하나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규범이 가장 강한 국가였다. 육아는 남녀 모두의 몫이라는 규범적 전환 없이는 아이가 짐이라는 인식이 사라지기 어렵다는 의미다.
최근 경제학에서도 사회적 규범과 출산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중 2021년 『유럽경제저널(JEEA)』에 실린 한 연구는 한국의 인구총조사와 가구조사 자료들을 이용해 불평등한 성별 돌봄 분담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사라지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1.2% 증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한국은 남성들의 돌봄노동 참여비율이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돌봄이 여성의 몫이라는 규범이 사라지고 남성들이 돌봄노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출산율이 증가할 수 있다는 예측이다. 그러려면 남성들이 가족과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일·가정 균형은 여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