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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루저를 만들지 않는 프랑스 교육
목수정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저자 2024년 04월호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의사 대란’을 지켜보며 IMF 대환란이 남긴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그 시절 ‘돈’ 이외 그 무엇도 가족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 세대가 체험했다. 그때의 아이들이 자라나 서울대에 가도 의대가 아니면 ‘루저’라는 의식에 젖어 신입생 상당수는 의대 진학을 위해 반수를 하는 신인류를 형성했다. 의사 대란 이전에 우리에겐 오로지 의사의 대열에 서길 갈망하는 신세대가 있었던 것이다. 왜 그들은 동일한 욕망 앞에 줄 서게 되었는가. 왜 우리의 교육은 뛰어난 아이들마저 루저로 만드는가.

그렇다면 프랑스의 수재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들은 소위 대학 위의 대학이라 불리는 그랑제꼴(프랑스의 소수 정예 고등교육기관)에 간다. 여러 그랑제꼴 중에서도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졸업생 수 대비 노벨상 수상자지수 세계 1위인 명문으로, 철학자 사르트르와 경제학자 피케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같은 지수에서 6위를 차지한 에꼴 폴리테크닉도 수재들을 불러 모으는 학교다. 전자가 과학·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자 양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과학·기술·경제 분야에서 관리자들을 길러내는 학교다. 어떤 그랑제꼴에도 의대는 없다. 의과대학은 전국 40개 대학에서 약 1만 명(2023년 기준)의 학생을 선발한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의대 공부는 수재보단 진득한 모범생들의 선택지에 가깝다.

상위권 학생들이 어떤 선택을 해도, 수억 원대의 연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프랑스 의사의 평균연봉은 9만 유로(약 1억3천만 원)로, 한국 의사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의사가 되건 연구자 혹은 엔지니어가 되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안정된 삶을 누린다는 보장은 받을 수 있다. 방대한 영역에 걸쳐 3만 명의 연구자(연봉 평균 8,500만 원)를 포용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는 각 분야의 연구 인력이 시장성과 무관하게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울타리가 돼준다. 뛰어난 인재들이 누리는 보상은 금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영역에서 누리는 지적 탐구의 자유에 있는 셈이다.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무장한 미국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이들을 유혹해 우수 인력이 유출되는 것이 작금의 문제이긴 하나, 프랑스 시스템은 여전히 시장의 힘에 저항하며 작동 중이다.

지난해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프랑스 입시생의 삶을 고스란히 관찰할 수 있었다. 중고교 시절, 학교에 다니는 것 외에 음악·미술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나라 안팎을 여행했다. 파리의 공립고교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 온 딸의 고교 시절은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실히 학업을 이행하면서 가끔은 친구들과의 밤샘 파티를 즐겼고 전시나 콘서트를 보러 다녔다. 입시생이라 누리지 못한 자유, 감수해야 했던 희생은 딱히 없었다.

진학 지도교사들은 어떤 직업이 유리할지 고민하기 보다 자신이 끌리는 분야로 첫발을 내밀라고 일관되게 조언했다. 어떤 학교가 학생의 성향과 더 맞을지도 면밀히 살펴준다. 여행과 독서, 다양한 문화생활은 자신의 관심사와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성적이 안 좋은 아이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 진학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부여하는 가치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으며 그 속에서 당당했다. 바로 거기에 프랑스 교육의 저력이 있다. 

지난 20년, 한국경제가 양적 성장은 거두었을지언정, 고사해 버린 가치의 다원성은 복원해 내지 못했다. 거듭된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그 자리에 다양성의 씨를 다시 심고 부단히 물을 주는 것.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의미, 루저를 줄이는 세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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