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나와 나이 차가 고작 50개월밖에 나지 않는 딸이 있다. 2년 전 나는 함께 살고 있던 친구를 딸로 입양했고, 그렇게 우리는 혈연과 결혼을 넘어선 새로운 법적 가족이 됐다.
우리는 10년 전 각자 시골로 이주했다가 우연히 이웃사촌으로 만났다. 귀촌한 여성이라는 공통점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우리는 단짝이 됐고, 시간이 지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친구와의 동거를 결심한 건 처음 귀촌해 살던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문제를 경험하고 난 후, 시골에서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안전망은 스스로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서다. 그러던 차에 이주한 두 번째 시골에서 성향이 맞는 좋은 친구를 만났고, 함께 살며 서로의 울타리가 돼주기로 했다.
친구와 즐거운 일, 슬픈 일을 함께하고 서로 의지하며 산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레 우리는 가족이 됐다. 그럼에도 굳이 친구와 입양가족을 이루게 된 건 법적 가족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비혼가구로 살면서 부딪힐 수 있는 ‘돌봄’ 문제가 고민됐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법정대리인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거동하기 불편할 때 나를 대신해 법률행위를 해야 할 수도 있고,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 때 보호자로 수술 동의를 해줘야 할 수도 있다. 3~4년 전 응급실에 몇 번 갈 일이 생기면서 보호자가 필요한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내가 늙고 병들면 내 보호자는 누가 돼주는 거지?’ 하는 걱정과 함께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노후를 꼼꼼하게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실 친구와 내가 처음부터 법적 가족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원한 건 위급 상황일 때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현재 심신이 건강한 동성 친구 사이에서는 입양을 통해 부모-자식 사이가 되는 것이 서로에게 보호자가 되는 가장 손쉽고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내년이면 우리나라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그만큼 고령층 1인가구도 늘고, 국가의 노인 돌봄에 대한 부담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서적 결합으로 이뤄진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법과 제도 안으로 받아들여 이들에게 가족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하는 건 국가를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다. 동거인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돌봄조차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친구가 입양가족을 이루게 된 것도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돌봄 문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돌봄 문제에서만큼은 법적 1인가구를 위한 느슨하고 유연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법적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거나, 동거하진 않더라도 이웃끼리 혹은 친한 친구끼리 서로 실질적인 돌봄을 하고 있다면 이들에게 법정대리인으로서의 권한을 일부 부여하는 것이다. 1인가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만큼 언제까지나 그 역할을 법적 가족에게만 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 법적 안전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친구가 엄마가 되고 딸이 되는, 어찌 보면 이상한 형태의 법적 가족이 계속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