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아느냐?” 어머니가 어린 내게 묻곤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는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기다리는 거다, 사람 기다리는 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나는 어머니의 자문자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1916~1999. 어머니의 생몰연대다. 어머니 생애를 미디어 변천사에 대입하면 편지와 전보, 신문, 전화, 라디오, 컬러텔레비전을 거쳐 인터넷이 막 대중화하던 시기까지 겹친다. 시골집에 전화가 생긴 것은 1980년대 초반. 그러니까 어머니는 생의 대부분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에 기대 살았다.
디지털 문명의 그늘, 기다림이 사라진 삶
195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라디오와 함께 성장해 디지털 문명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나도 농경문화의 끝자락을 체험한 세대다. 하지만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다는 저 ‘느림의 감수성’은 어느새 퇴화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버스정류장 도착 안내 전광판 아래서 기다림에 이내 지치고 만다.
기다림이 고문에 가깝다는 어머니 말씀을 절감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 문자 메시지 한통 없이 자정을 넘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아이러니 앞에서 무참해졌다. 돌아보면, 디지털 단말기가 신체에 부착되면서 기다림이 급격하게 사라졌다. 가족 사이, 연인 사이, 상사와 부하 사이―이 모든 사이가 기다림이다. 그런데 이 기다림의 시간을 접속, 통화, 검색이 앗아가 버렸다.
디지털 신기술이 제시해온 ‘낙원의 한 장면’이 업무 자동화, 디지털 노마드였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여가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재택근무도 가능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일중독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노동 강도가 더 심해졌다. 한 뇌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사랑, 일, 놀이’다. 그런데 사랑과 놀이를 위한 시간을 일이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세 요소: 사랑, 일, 놀이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는 대부분 일 중독자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않고, 일하기 위해 먹고 사는 일중독자. 사랑? 휴식? 일 앞에서는 사치스런 이야기다. 내 아들딸 세대 또한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성격은 다르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일에 얽매여 있다.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 미래가 불투명해서 사랑은커녕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 부모와 자식 세대가 일을 놓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사회로 진출해야 할 젊은이와, 사회로부터 밀려나는 노년층이 일 때문에 한숨을 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다림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기다림은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만든다. 거리가 생겨야 삶의 문제를 응시할 수 있다. 시간이 있어야 나의 내면,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다. 기다림은 기억하고 공감하고 꿈꾸는 근원적 사유 행위다. 디지털 문명과 결합한 일중독-일자리 없는 사회가 모든 사이-기다림을 무력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왜 사는가. 끊임없이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일주일에 한 시간만이라도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고 물어보자. 나는 왜 사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 나서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기다려보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