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나 불치병 이런 거면 휴먼스토리라도 만들 텐데 전 살 빼려고 들어왔다.” 왜 서울을 떠나 평창에 살게 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선철 대표의 돌직구 대답이다. “1999년에 가수 이승환의 전국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쓰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나이는 30대 중반인데 ‘콜레스테롤에 동맥경화에 난리가 났구만.’ 하더라. 뇌경색도 왔다.” 그래서 시작한 시골생활. 하지만 귀촌했다고 그의 DNA가 변하겠는가. 20~30대 문화기획자로 날리던 유명세답게 고등학생들로 이뤄진 ‘대일밴드’를 키워 지역에 밴드열풍을 일으키고, 둥지를 튼 폐교는 감자꽃스튜디오라는 주민들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해 마을의 중심이 됐으며 이젠 전국에서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이선철 대표를 만나 감자꽃스튜디오에 얽힌 사연과 귀촌 11년차 시골생활의 애환과 지역에서 문화기획자로 살아가는 보람에 대해 들어봤다.
살 빼러 왔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하하. 내려와서 처음 1년간은 채식 위주로 식사하고 산에도 오르고 했더니 한 30킬로가 빠지더라. 그런데 1년 후 요요현상이 왔다.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으레 술과 고기를 먹게 되니 어쩔 수 없더라. 살 빼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20~30대를 굉장히 바쁘고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 시기에 주로 읽었던 책이 자연친화적인 삶을 주제로 한 「월든」 「조화로운 삶」이었는데 그 영향도 있었고. 시골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지금 와서 보면 잘한 선택인 것 같다.
감자꽃스튜디오, 감자가 유명한 강원도를 상징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아니다. 이 공간을 처음 만들 때 옆에서 일을 돕던 친구가 있었다. 영월 출신으로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나왔는데, 그가 쓴 동화 제목이 ‘감자꽃’이었다. 쑥스러우니까 나한테 말을 안 한 건데 신춘문예에 턱 당선된 거다. 기특하니까 축하하는 의미로 교실 하나를 ‘감자꽃’ 어린이도서관으로 만들려고 작업하던 중에 도지사님이 방문하면서 일이 커진 거다. 나중에 해석을 해주는 분들이 감자가 강원도의 상징이고 꽃은 문화가 아니냐고 그러시더라.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가만히 있었다.
도지사님이 방문하면서 일이 커졌다?
살 빼러 들어온 거라 처음엔 끝 방 하나 고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지사님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찾아오셨다. “우리 강원도가 인구가 자꾸 줄어 일반인이 들어온다고 해도 환영할 판인데 문화전문가가 들어왔으니 이것을 개인 별장처럼 쓸 게 아니라 지역 문화공간으로 쓰면 어떻겠느냐?” 하시는 거다. 나야 교육청에서 임대한 거니까 “그러시죠.” 했더니, 군청이 폐교를 매입해 초보적인 인프라를 갖춰줬다. 나는 거기에 화답하는 의미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거고.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감자꽃도서관이 감자꽃스튜디오가 된 거다.
방 하나 쓸 건데 왜 굳이 폐교를 선택했나?
김덕수패사물놀이 기획실장 할 때 충남 부여의 폐교를 사물놀이 학교로 만들고, 경기도 양평의 폐교를 악기공방으로 개조한 경험이 있었다. 폐교를 일단 확보하면 살면서 뭔가 궁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신축건물을 임대하기엔 돈도 없었고. 그 당시 여기 임대료가 연간 500만원이었으니까 월 4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 정도 월세에 이 공간을 다 쓰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30대 중반의 남자가 혼자 폐교를 임대해 쓴다? 주위에 경계하는 분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한 마을에 들어왔는데 왜 경계심이 없었겠나. 처음에는 수돗물도 끊고 나름 어려움이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주민들하고 융화할 수 있는 계기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교회였다. 교인이 곧 주민이고 주민이 곧 교인이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또 마을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친다든지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주민이 운영하는 시설을 이용하게 한다든지 하는 과정에서 많이 좋아졌다. 또 하나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 내 인상이 서울에 갖다 놔도 크게 어색하지 않고 동네에 갖다 놔도 모나지 않은 편이다. 둥글둥글하게 술도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고. 대부분 귀촌한 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술 문화인데 ‘농촌에서의 정착과 융화를 위해선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어떻게 컨설팅보고서에 쓰겠나. 하지만 정서적 동질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여기 분들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또 주민이라도 읍내에 사는 분, 귀촌한 분, 리에 사는 분들의 문화가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를 존중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 같다.
당연한 것 아닌가.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즐거움도 있고 보람도 있는 대신 서운함도 있고 스트레스도 있다. 어떤 경우엔 그 스트레스가 감당할 만하지만 어떤 경우는 나처럼 마음에 맷집이 센 사람이 아니면 크게 상처를 입는 일도 있다. 지난해엔 이런 일도 있었다. 일명 ‘단오 만취사건’이라고, 단오와 내 생일이 겹친 거다. 여기는 단오에 마을잔치를 하는데 내 생일이 알려져 할머니들이 축하노래도 불러주시고 부녀회장님은 읍내에서 케이크도 주문해주시고,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다. 그런데 내가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 와보니 평소 나를 ‘마을의 보물’이라며 좋아해주시는 이장님이 만취하셔서 “지가 다 좋아서 한다고 하지만 생기는 게 있으니까 하는 거지.” 하시는 거다. “아저씨 저 왔어요, 왔어.” 해도 못 들으시고. 앞에 앉은 분이 자리가 어색해질까 봐 “아, 이 선생, 시골에서는 똥마려워도 중간에 일어나면 안 돼. 여긴 자리만 뜨면 욕이라고.” 하시는데, 내가 여기서 얼굴을 붉혔다면 아마 서로 힘들어졌을 거다.
생기는 게 있긴 한가?
감자꽃스튜디오를 운영해서 생기는 수입은 연간 2천만원 정도다. 상근 직원 한 명 월급 주고 전기세 내면 끝이다. 용인대 전임교수를 하면서 그 전에 나갔던 학교들도 강의를 하고 있다. 교수임용 됐다고 감자꽃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을 하루아침에 자를 수 없어서 그 친구들 월급 주려고. 그럼 나한텐 뭐가 남느냐 하면, 여기 방문하는 분들로부터 받는 강의사례비와 지역에서 문화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성공사례로 감자꽃스튜디오가 알려지면서 특강, 자문, 연구, 용역을 많이 한다.
문화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나?
많은 분들이 문화는 돈을 쓰거나 돈이 안 되는 일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계시는데, 그렇지 않다. 거창한 이론을 들지 않아도 예를 들어 우린 좋아서 동아리처럼 프로그램을 만들어 마을축제를 했는데 방문객들이 엄청 왔다. 외부 지원도 없이 연예인을 섭외한 것도 아닌데 운동장이 가득 차게 열광하고. 또 농산물을 팔더라도 디자인을 문화적으로 하면 사람들이 훨씬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실 선진국들도 문화를 표방하고 있는 것들이 뒤에선 무서울 정도로 경제적 부가가치를 노리고 한다. 영국의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도 관광청에서 주관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적 수준이 높을수록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는데, 돈 벌어주는 문화가 따로 있고 돈 쓰는 문화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여기 분들은 이제 아시는 것 같다. ‘문화로 유인해 관광으로 돈 벌자.’, 내가 만든 구호다(하하).
서울로 다시 올라갈 생각은 없나?
전혀 없다. 내가 66년생인데 이렇게 기운차게 재밌게 살 시간이 2년 정도일 것 같다. 50에는 50에 맞는 인생이 있지 않나. 젊었을 때는 멀티한 일을 하는 것이 재미가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좀 더 마이크로한 일을 해보고 싶다. 그래서 맥주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여기도 빈집이 계속 늘고 있다. 그 집들을 레지던스로 개조해 독거 문화예술인 밸리를 만들려고 한다. 내가 만든 맥주 나눠 마시면서 마을축제나 하고 후배들에게 멘토 역할이나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