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슬로우 아트를 주제로 다양한 전시를 진행했다. '달리는 세상, 걷는 예술, 쉬는 마을'을 내세운 전시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가속화된 패스트 아트를 반성하고 예술이 가진 고유한 느림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처럼 젊은 예술인들의 독특한 문화공간에서 느린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이곳에 ‘느림’을 전면에 내세운 미술관이 있다. 느림과 관계의 미학을 지향하는 백순실미술관이 그것. 이번호 <느리게 사는 법>에서는 동명의 미술관 설립자 백순실 작가(62)의 인생얘기를 들어보았다.
자유로를 달려 예술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커다란 굴참나무가 외벽을 숭숭 뚫고 나온 미술관 건물이 한눈에 보였다. 이제는 헤이리의 명물이 된 건축물에 대한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민이 많았어요. 미술관은 지어야겠는데 나무가 딱 버티고 있으니. 건축가와 상의 끝에 나무를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였죠. 덕분에 건축상도 받았어요. 근데 정작 건물에서 더 공을 들인 부분은 콘크리트 외벽이에요. 제 작품 중 ‘대지의 노래’를 형상화한 건데, 땅의 거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일일이 요철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미술관 외벽 전체를 대지로 표현할 만큼 땅에 대한 깊은 애착은 그의 작품에도 반영됐다.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는 '동다송(東茶頌); 차를 노래하다' 시리즈도 차보다 차를 키워낸 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찻잎을 이용해 갈색을 켜켜이 쌓아올려 흙내음을 표현하고 화산석으로 땅의 질감을 나타낸 것도 그런 이유다. “어릴 때 농장에서 컸기 때문에 눈을 뜨면 항상 꽃과 나무가 보였어요. 식물의 색, 질감을 통해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차이를 느꼈죠.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미대에 진학하게 된 이유도 그거에요.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니까.”
백 작가는 사진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다고 했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던 그가 판화에 집중해 40여 년간 판화작업을 해 온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엔 세필로 선을 중첩해서 그렸어요. 허령(虛靈), 반복을 통해 잡념을 없애는 것. 제 작품의 출발이었죠. 다음엔 색, 특히 보색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땐 완전히 색으로만 표현했죠. 그렇게 조각, 영상 등 여러 가지를 해보니 나에게 맞는 방법이 걸러지더라고요. 여러 겹의 판을 올려 판과 판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판화작업에 큰 매력을 느꼈죠.”
미술관에는 백 작가의 대형 판화가 전시돼 있었다. 두텁게 표현된 물감의 거친 질감이 건물 외벽에서 느꼈던 땅의 생동감을 다시 느끼게 했다. 전시실을 나와 2층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김은영 학예연구실장도 함께했다. “국화, 블루베리 등 카페에서 판매하는 음식의 재료를 직접 키워요. 건물, 정원, 식재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백 선생님의 손길이 닿아 있죠. 말 그대로 백순실미술관이에요.”
정작 백 작가 본인은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지극히 시골스러운 이름이 현대미술관 이름으로 가당하냐는 것이다. 김 실장이 이제야 백 작가와의 관계를 밝히며 얘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제가 백 선생님 둘째 딸이에요. 20대 때 엄마와 여행을 많이 했는데, 그때 엄마이자 작가로서의 백순실을 이해하게 됐죠. 미술관이 느림을 지향하게 된 것도, 나무를 품어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도, 일부러 동선을 불편하게 해 오솔길을 걷게 한 것도 모두 백순실의 삶에서 비롯했어요. 백순실(白純實),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전한 열매라는 뜻처럼 이 미술관도 꾸밈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원해요.”
“저렇게 설득하는 바람에 내가 넘어갔어요. 워낙 말을 잘 하니까.(하하)”라며 백 작가는 소위 말하는 ‘엄마미소’를 짓는다. 이왕 모녀관계가 밝혀진 차에 김 실장은 어릴 때 얘기를 들려줬다. “엄마 작업실에 가는 게 좋았어요. 쉽게 볼 수 없는 파란 돌가루와 형형색색의 물감이 있는 놀이터였죠. 작업 도구들을 가지고 언니, 동생과 놀고 나면 다 같이 차를 마셨어요. 이 때의 기억이 생생해요. 빠른 일상을 살아가지만 멈춰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와요. 그래서 우리 미술관에서 하는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에 다도체험을 넣었죠.” “어린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가만히 있지 못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백 작가가 말을 받았다. “다도체험을 할 때는 제가 육십 평생 모은 다기를 모두 보여줘요. 신기한 주전자에 물이 담겨 있으니 얼마나 마셔보고 싶겠어요. ‘이걸 언제 마시나’하는 눈빛으로 기다리다가 드디어 차를 마셔요. 그럼 애들 반응이 어떤 줄 알아요? ”이거 맛 없는데 왜 마셔요?“ 이래요.(웃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차가 맛이 없었다’는 기억을 비롯해 당시의 풍경이 입력되요.”
백 작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주위 환경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말했다. “미술관에 온 엄마들을 보면 작품 앞에 애들 세워 놓고 사진 찍기 바빠요. 아이들은 그냥 놀게 하면 돼요. 제 외손녀 수인이가 여기 와서 뛰어놀더니 “할머니는 무슨 색을 좋아해? 난 핑크 좋아하는데”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수인이는 꽃과 그림에 나타난 다양한 색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거에요. 경험하는 게 중요해요.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그게 습관이 되면 자연히 주변에 귀를 기울이게 되요.“
백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로 추상화를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을 이러한 경험에서 찾았다. “형태가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선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고 섬세하게 그것들을 작품에 끌어와야 해요. 예전에 팥죽 끓는 소리, 비파 떠는 소리 등 한국의 소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어요. 제일 어려웠던 건 어린 아기의 옹알이 소리에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요? 하지만 모든 소리에는 음색(音色), 선율, 강약이 있어요. 그걸 느끼고 표현했죠.“ 그녀가 클래식 음악을 그림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 작가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비제의 ‘아를의 여인 조곡’ 등의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음악찬미(Ode to Music)’로도 유명하다.
관람객들이 떠나고 셋만 남은 고요한 카페를 클래식 음악이 채웠다. 마지막으로 느림에 대해 물었다. “요즘 현대미술은 삶과 떨어져 벼랑 끝으로 가려고 해요. 그런 것도 필요하죠. 하지만 영혼에 도움이 되는 예술은 삶을 따뜻하게 반추하게 하는 거 아닐까요. 아트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는 거죠. 예전에 어떤 분이 제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백 작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긴 호흡으로 활동할 거라고. 그게 참 좋았어요. 우리 인생 자체가 긴 호흡이잖아요. 내 삶이 내 작품이듯 각자의 삶이 모두 예술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