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나무늘보는 세 발가락을 가진 예쁘게 생긴 동물이다. 나무 잎사귀나 싹을 주로 먹고 사는 나무늘보는 몸무게의 절반 이상이 위에 섭취한 내용물로 되어 있다. 여러 구획으로 나눠진 특수한 위가 이것을 한 달 이상 소화시킨다고 한다. 나무늘보는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씩 나무에서 내려와 나무 밑에 배설을 하는데 자신이 섭취한 음식의 대부분을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매우 유익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늘보는 오랫동안 생물진화의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하루 종일 나무에서 잠을 자거나 빈둥거리는 나무늘보는 서구인들에게는 나태나 게으름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의 사다리 맨 마지막 단계에 위치한 나무늘보가 가장 자연친화적이라는 역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동물들의 시간은 느림의 시간이고 인간의 시간은 현대화될수록 빠름과 정확성을 선망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분리해 생각했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다는 신화적 은유로서, 크로노스의 시간은 시계바늘의 운동과 궤적을 뜻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내가 몸과 마음으로 살아내는 질적 심리적인 시간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수학적으로 공간화된 크로노스의 시간은 그대로인데, 심리적ㆍ정신적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현대인들은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을 팽창시킴으로써 하루 24시간이라는 정량적 시간의 효율화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20세기 초 사모아 근처 작은 섬 추장인 투이아비가 서유럽을 방문한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투이아비가 가장 놀란 것은 서구인들이 몸에 시간을 쪼개는 기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투이아비는 빠빠라기로 불리우는 서구인들이 시간을 매우 잘게 쪼개면서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빠빠라기들은 시간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면서 시간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투이아비에게 시간은 단지 해가 뜨고 밤이 오는 것 이상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쪼개고 더 바삐 산다고 해서 24시간이라는 시간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미세한 분할과 팽창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깨고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오래전 성자(聖者) 어거스틴은 ‘시간은 무엇인가?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현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절규한 바 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고요하고 온전한 미스터리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시간을 분할하고 그것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자만심, 즉 시간의 근원성, 현재 이 순간의 신비함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의 엄격한 관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존재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다.
우리는 다시 투이아비의 속삭임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고요함을 사랑하고, 거적에 누워 느긋하게 쉬기를 좋아한다. 빠빠라기는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빠빠라기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을 잘못 다루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