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에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인권 보호를 위협하고 세계 독재자들의 박해를 부추기는 위험한 징조다.” 비영리 국제인권감시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올해 초 발간한 『월드 리포트 2017: 선동가들이 인권을 위협한다』의 맨 앞에 ‘포퓰리즘의 위험한 득세’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증오와 불관용을 조장하는 선거 캠페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유럽에서도 보편적 인권을 부인하는 정당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립돼온 인권체계를 위험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본부를 둔 이 단체가 서방의 포퓰리즘을 인권 문제로 지목한 것은 전례가 드물다.
유럽은 멀리는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 이후, 짧게 잡아도 1960년대 68혁명 이후 반세기에 걸쳐 자유, 평등, 관용, 인권, 연대, 민주주의, 소수자 보호 등 보편적 가치의 개척자이자 수호자를 자임해왔다. 자유무역과 복지제도의 확대, 이주자 환대, 유럽연합(EU) 결성 등은 그 구체적 표현이자 결과였다. 경제 통합을 넘어 정치 통합까지 지향하는 EU의 구상에는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경계와 다짐이 녹아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유럽에서 급부상한 포퓰리즘은 그런 가치들의 상당 부분을 정면으로 부인하거나 무시한다.
‘포퓰리즘’은 흔히 ‘대중 영합주의’로 이해된다. 그러나 애초 포퓰리즘은 엘리트 관료주의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나왔다. 사전적으로는 ‘보통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 사상이나 활동’으로 정의된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좌에서 우까지 폭이 넓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우리’ 안에서 ‘타자’를 구별하고 배제하며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집단 이념으로 나타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현재 유럽에서 반이민, 반이슬람, 반EU를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이 그렇다.
유럽의 우파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재정 위기와 경기침체에 따른 고용 및 복지 축소, 시리아 내전이 낳은 대규모 난민 위기와 빈번한 테러 공포, 그에 따른 대중의 불안감과 박탈감, 정체성 위기감 등에서 비롯한다. 여기에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이 보태지면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내지 국가주의로 표출되고 있다. 외국인 이주자들은 환대는커녕 적대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경향은 EU 대다수 국가들이 단일통화 경제권인 ‘유로존(Euro zone)’에 묶여있는 현실도 한몫을 했다.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생산력과 경제구조, 구매력과 물가 수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며 공동의 통화·재정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개별 국가의 경제주권 침해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불만은 급기야 지난해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결정으로 분출됐다. 독일 사회민주당 싱크탱크의 국제정치 전문가 마이클 브뤼닝이 지난해 6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의 기고에서 “포퓰리스트의 득세는 기성 정당들의 명백한 정치적 실패에 대한 이성적 반응이며, 공민권 박탈감에 대한 정서적 반발”이라고 짚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최근 오스트리아 대선과 네덜란드 총선에서 여론조사만으론 집권까지 넘보던 극우 정당들이 잇따라 패배하거나 찻잔의 태풍에 그쳤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또 다른 시험대가 놓여있다. 오는 4월 23일 대선 1차 투표를 치르는 프랑스에선 극우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 결선에 진출할 게 확실시된다. 독일도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브렉시트 이후 EU의 양대 축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EU를 이탈하거나 유럽 통합의 가치를 부인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할 경우 그 파장은 EU의 균열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의 포퓰리즘이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이 아닌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