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사 봐도 저걸 기웃거려 봐도 딱 맞는 제품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바로 이거야!”라고 외칠 만한 녀석을 손에 넣기까지 치른 비용만 얼만가. 그나마도 쓰다 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답답해도 어쩌랴. 시중에 있는 것 중에 골라 쓰는 수밖에. 여기까지가 소비자(consumer),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사람, 도대체 내가 필요한 여행가방은 왜 없냐며 직접 제작에 나선 소비자(프로슈머·prosumer)가 있다. 트래블러스 하이 박인혁 대표다.
홍콩으로 유학 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잦은 해외출장길에서 박 대표는 늘 답답했다. 3박 4일, 4박 5일의 그리 길지 않은 일정에 꼭 맞는, 원하는 기능을 담은 여행가방은 왜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결심했다. “살면서 가방이라곤 2번밖에 사본 적이 없던 제가 답답한 마음에 직접 만들게 됐습니다. ‘망하면 내가 쓰면 되지’ 하면서요. 내가쓸 거라고 생각하니 더 잘 만들고 싶었어요.”
LG화학에서 플라스틱 개발 업무를 하던 그는 퇴사 후 창업했다. 가방을 아이템으로 삼은 것은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했지만 3개월간 창업준비에 쓴 돈이 생활비를 포함해 300만원에 불과했을 정도로 비용이 낮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 대표가 보여준 첫 제품 스케치는 수첩에 자를 대고 그린, 어쩌면 장난 같은 그림이었다.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는 디자인도, 봉제도, 원단도, 아무것도 몰랐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가방 매장을 둘러보고 지하철역과 공항에서 사람들 가방만 쳐다보면서 시장조사를 한 뒤 원단을 조사하러 동대문으로 향했다. 3천개가량의 원단가게들을 거의 다 살펴보았을 때쯤 한 상인이 일러주었다. “가방? 여기 있는 원단은 옷 만드는 거예요. 가방원단 보려면 신설동으로 가야지.”
시행착오는 계속됐다. 원단가게에 이어 봉제공장 30~40여곳을 둘러본 박 대표는 아이디어를 구현할 샘플 제작에 나섰다. 샘플 2개를 시쳇말로 ‘말아먹은’ 뒤 세 번째 샘플에서야 원하던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선택한 길은 크라우드 펀딩. 와디즈에서 목표로 한 3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3,200여만원을 펀딩했다. 지난 8월, 6번째 펀딩에 이르기까지 총펀딩액만 약 1억8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행용 백팩에 이어 보스턴백과 메신저백을 차례로 내놨다.
꼭 필요한 기능을 추려 넣었다는 여행용 백팩은 앞부분에 크로스백을 탈부착할 수 있고 내부는 칸막이를 떼거나 붙일 수 있게 해 짐이 섞이는 것을 막아준다. 소매치기를 막아주는 비밀 공간, 여권을 넣는 주머니도 만들었다. 보스턴백에는 신발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메신저백은 복대를 닮은 웨이스트색으로 분리해 사용할 수 있다.
‘사용자 경험’을 토대로 진화하는 트래블러스 하이의 가방은 고객들의 피드백이 제품 업그레이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 고객들 역시 프로슈머라 할 만하다. “한 고객은 일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유학생인데 나중에 여성용 가방을 만들 때 참고하라며 카페 냅킨에 아이디어를 정리해 보내줬어요. 또 AS 때문에 만난 한 고객은 2시간 동안이나 제품 피드백을 들려줬고요.”
그래서일까. 그는 고객 응대를 중시한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다는 답글만 봐도 그렇다. 인터뷰 하러 온 그의 손에 새 가방이 들려 있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내일 출국하신다는 고객에게 가져다 드리려고요. 택배로 보내면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서요. 종종 이렇게 배달도 합니다(웃음).”
트래블러스 하이의 마지막 라인업은 캐리어다. 스스로 필요를 느끼고 공감을 해야 제품으로 만든다는 박 대표가 캐리어를 무척 싫어하기 때문.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어 가방을 만들기 시작한 트래블러스 하이의 정체성과 맞닿는 부분이다. 최종 숙제인 캐리어를 만들 때까지 소비자의 마음으로 제작하는 그의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