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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내 휴대폰으로 시가 배달된다
박신규 시인, 창비 ‘시요일’ 기획위원장 2018년 10월호



스물 몇 살, 문학청년 시절 이유 없이 아프고 절망할 때 밥 한끼보다 소중한 것은 시집이었다. 갖고 싶은 시집이 대학서점에 없으면 주문해놓고 며칠을 기다리다 달려가 반갑게 구입하곤 했다. 한 달 치 생활비를 시집 사는 데 몽땅 털어넣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쫄쫄 굶기도 했던, 휴대폰은커녕 삐삐 정도가 유행하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시집 1천여권이 거실 책장에 꽂혀 있다. 흡사 언어의 무덤 같다. 자주 꺼내보지 않아 청소할 때마다 먼지 날리는 시집들.
이제 누가 그 시절 방식으로 시집을 찾을까. 초판 2천부도 채 팔리지 않아 재고로 남는 것이 시집이다. 웹의 시대도 지나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의 시대, SNS로 공유하는 짧은 텍스트는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데 굳이 종이책 시집을 찾아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느림의 미학도 빠르게 흘러가버린 유행이 됐다. 속도전, SNS, 모바일에 맞는 짧은 텍스트….

이러한 환경에서 출판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하는 가볍지 않은 고민과 역발상이 시 전문 앱 ‘시요일’을 기획한 출발점이다. 창비가 출간한 시집들과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시들을 꺼내보니 600여권, 편수로는 3만5천여편이 넘었다. 기획을 시작한 이후 3년 넘게 시집의 디지털라이징과 원문 대조 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젊은 시인들이 모여 작품의 핵심 시어와 주제어를 분석했다. 디자이너는 앱의 인터페이스를, 엔지니어들은 앱을 설계·개발했다. 많은 인력이 모여 토론하고 수정하는 지난한 작업 끝에 2017년 4월 ‘세상의 모든 시, 당신을 위한 시 한 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요일’이 출발했다. 론칭 6개월 만에 10만명이 다운받았고, 1년이 채 되기 전에 20만명, 올해 9월에는 25만명이 넘는 사람이 ‘시요일’을 보고 있다.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 요인은 다양할 테지만 뭐니 뭐니 해도 SNS 시대와 그 세대가 짧은 텍스트를 원하는 동시에, 질 좋고 깊이 있는 단문 콘텐츠인 시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마다 그날에 어울리는 시 한 편을 배달(푸시)하는 ‘오늘의 시’, 상황과 주제에 맞는 시를 묶어 큐레이션해주는 ‘테마별 추천시’, 책·영화·반려동물 등 여러 주제의 산문을 싣는 ‘시요일의 선택’처럼 다양하고 알찬 콘텐츠를 앱만 켜면 바로 읽고 친구와 SNS로 공유할 수 있다. 독자가 앱 내에서 시를 쓰고 시집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시작(作)!일기’도 새롭게 론칭했다.
꾸준한 업데이트도 무시하지 못하는 요인이다. 앱의 고도화 작업을 지속해왔으며 신간 시집과 미처 디지털라이징하지 못한 구간 전집 등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현대시와 쌍벽을 이루는 고시조 7천여편도 가탑재해서 분석하는 중이다. 이용자 주문형 시집 생산(POD)도 곧 가능하도록 개발하고 있다. 종이책 무덤에서 걸어나온 시가 앱을 통해 독자의 취향에 맞는 새로운 종이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은 줄 알았던 시가 ‘시요일’이란 뉴플랫폼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너무 가볍게 시를 소비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모든 세대에 걸쳐 다시 시를 읽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시가 아무리 빠르게 소비될지라도 시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의 가슴에 남은 문학적 감수성은 개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 사회를 덜 각박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이용자들의 먹먹하고 감동적인 평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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