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정보센터

ENG
  • 경제배움
  • Economic

    Information

    and Education

    Center

이슈
“혹시 독립출판에 관심 있으세요?”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 이야기
한량「 원서동 자기만의 방」 저자 2018년 10월호





머리 염색을 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뿌리염색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한 달에서 두 달여가 흐르면, 일명 ‘뚜껑’이 생겨난다. 그날도 뚜껑에 색을 덧입히러 미용실을 찾았다. 가운을 둘러 얌전해진 나는 미용사분이 가져다준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다음 계절의 컬러, 바다 건너 스타의 가십, 스르륵 넘기는 페이지 사이 짤막한 인터뷰가 보였다. 해방촌에서 독립서점을 꾸리고 있는 사장님의 이야기. 한 장짜리 그 인터뷰가 눈을 넘어 마음에 박혔다. 어렵사리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낸 뒤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 가보리라 다짐을 하면서.
그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평범한 주말 오후. 남산 소월길에서 용산고 방향으로 접어드는데, 가파른 내리막길 한편에 잡지 속 서점이 보인다. ‘스토리지 북앤필름’. 자석에 이끌리듯 들어서 낯선 책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리던 교보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서가에는 그야말로 개성 넘치는 책들이 가득했다. 판형은 다양하고, 폰트는 더욱 새롭다. 내용은 만든 이들의 세밀한 관심사를 대변한다.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 멀리 떠난 곳의 이야기, 퇴사하고 나서의 이야기, 새롭게 도전하는 이야기, 망하고 또 망한 이야기 등등. 이것저것을 살피며 관심을 보이는 내게 사장님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독립출판에 관심 있으세요?”
그 한마디가 나를 여기에 발 디디게 했다. 오래전부터 나도 뭔가를 쓰고 만들어보고 싶었다. 누가 읽어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종이 위에 펼쳐놓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예전 글들을 꺼내봤다. 습작 아닌 졸작들. 거기엔 지난 시간들이 녹아 있었다. 글 속의 난 늘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어 했다. 글 밖의 일상에서 고된 노동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스러기처럼 토막 난 시간에 나는 일과 관련 없는 것들을 찾아 헤맸다. 돈 버는 것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 억지로 해야 하는 일과 제일 동떨어진 것. 내게는 그것이 글쓰기였다.
자기 전 꿈과 섞여 스치는 생각, 걷다가 드는 생각, 그냥 떠오른 생각들이 희미하게 흩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비슷한 것들끼리 뭉치기 시작한다. 마치 먼지가 만들어지는 과정 같았다. 공중을 떠다니던 것들이 시간의 힘을 빌려 켜켜이 쌓인다. 그러면 단어를 엮고 기워 문장을 만든다. 문장을 누벼 문단을 만들고, 문단을 그러모아 한 편의 글을 쓴다. 짬 날 때마다 기워낸 조각보 같은 나의 글.
꽃시장에서 사온 꽃을 다듬어 일주일을 바라보듯 글을 쓰는 일은 무용해서 좋았다. 마른 꽃잎으로 책갈피를 만드는 것처럼 지난 글들을 모아 나의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늘 깨금발을 디디며 동경하던 담 너머로 기어 올라간 느낌이었다. 낯설기만 한 인디자인을 더듬더듬 익히고, 글과 사진의 배치에 열을 올렸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누구의 조언도 없이 온전히 내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가는 과정.
인쇄소에 넘긴 파일이 드디어 실물의 책으로 완성되던 날, 새 책 냄새를 맡는데 마음이 묘했다.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가던 화면이 좌우로 펼쳐지는 페이지가 됐다. 얇은 페이지들이 만들어낸 책의 단면. 그건 내가 만들어낸 내 이야기였다. 누가 대신 말해주지 않는 진짜 내 이야기. 그렇게 세 권의 책을 만들고 난 후 난 종종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나중에 내 무덤에 책도 같이 넣어줘.” 이야기더미에 파묻히고 싶은 욕심 덕에 난 계속 쓸 것이다. 쓰고 만들 것이다. 느린 리듬으로 천천히 천천히, 라르고(Largo) 라르고.

보기 과월호 보기
나라경제 인기 콘텐츠 많이 본 자료
확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