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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시간이 특별한 추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기를
한정진 LG화학 책임연구원 2019년 08월호

어린 시절, 아버지와 부산 사직구장에서 야구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와 나 단둘이 했던 몇 번 안 되는 외출이어서 그런지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나와 시간을 보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일에는 일하느라 타지에 계셨고 집에 돌아온 주말이면 늘 밀린 잠을 청하셨다. 그건 비단 우리 아버지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랬다. 나 역시 아빠가 되고 나니 우리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아들은 아직 어려 내가 출퇴근할 때는 모두 자고 있고 주말이 돼서야 아이들의 뜬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 아내도 내 야근이 달가운 눈치가 아니었다. 야근 후 밤 늦게 퇴근했을 때 집안 분위기는 늘 고요하고 무거웠다. 가정을 위해 그 시간까지 일한 것인데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가끔은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허무함마저 느껴졌다.
지난해 회사에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고 나서야 나는 진정한 가족 구성원이 된 기분이다. 내가 곁에 있어도 늘 엄마만 찾던 두 아이는 이제 나의 퇴근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회사는 정시 퇴근에 눈치 보거나 눈치 주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탄력근무제도 예전에 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택의 저녁 시간 분위기도 바뀌었다. 사택의 이웃들은 회사 동료들이기도 한데, 요즘엔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온 아빠들로 사택 놀이터가 붐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을 같이 보낼수록 알게 됐다. 아이들은 최신 장난감을 갖고 하는 놀이보다 그저 나와 살을 부대끼며 하는 놀이를 더 즐거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겁쟁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킥보드를 탈 때는 다리를 들고 탈만큼 대범한 첫째 아들, 형보다 적극적이어서 늘 활발한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부끄럼쟁이가 되는 둘째 아들. 예전이라면 결코 몰랐을 모습들이다. 예전에 아내가 아이들이 하루하루 커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할 땐 실감하지 못했다. 이제 와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수록 지금 이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늦게 퇴근하면 그저 뾰로통하기만 했던 아내의 모습이 답답한 적도 많았는데 요즘 아내는 수다쟁이가 됐다. 예전에는 모두가 잠든 뒷모습을 보며 잠을 청했지만 이제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주말에는 어디로 놀러 갈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이야기꽃을 피우며 아내와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기 전, 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내 역할이 그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가장 바랐던 것은 나와 교감하는 시간이었음을 실감한다. 신기하게도 가족들과 갖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퇴근 후 느꼈던 허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행복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 행복이 일터에서도 큰 에너지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유년기 시절 아버지는 늘 먼발치에 계셨다. 가까이하고 싶지만 너무 먼 당신.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와 대화를 열 마디 이상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 그런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 먼발치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살 부대끼는 아버지로 남고 싶다. 나와의 시간이 특별한 추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인 아이들로 자라나길…. 달라진 근무제도를 통해서라면 어쩌면 꿈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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