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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더 유효한 ‘작은 여행’의 기술
최재원 라이프쉐어 대표 2020년 08월호



작은 음반기획사에 다녔다. 너무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한다는 것만으로 삶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일-잠-일-잠으로 쳇바퀴 도는 강한 강도의 직장생활은 ‘나’라는 사람을 점차 잃어버리게 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스스로 살려고 만든 것이 ‘작은 여행’이라는 개념이었다.
야근 후 11시가 돼 집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돼서도 나를 위한 페이크 트래블(fake travel)을 시작했다. 뜨거운 샤워로 일상을 잠시 끊어내는 것이 의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주워 입고 문고리를 잡고, 주문을 외웠다. ‘이건 여행이다. 나는 지금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늘 출퇴근길로 걷던 동네 거리를 처음 도착한 여행지처럼 신선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스스로를 마치 이 도시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처럼 생각했다. 한여름으로 넘어가는 가로수의 냄새를 맡고, 밤하늘에 걸린 달이 어떤 빛깔인지 한참을 탐닉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작은 바나 카페에 들어가 혼자 구석자리에 앉아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한낮 동안 내내 남을 위해 인사하고 배려했던 레이더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하루의 에너지를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 아껴 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작은 종이를 빌려 토해내듯 끄적였다. 다시 보지 않을 글이었다. 그저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정들, 치졸한 생각, 걱정, 미래, 후회했던 순간들을 처음 보는 종이에 꺼내놓았다. 그러면 내면에 에너지가 조금씩 조금씩 차올랐다. 그때 살려고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 나를 살리는 명상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매일매일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직장에서 굳어진 근육이 조금씩 풀렸다. 혼자만의 작은 심야 여행은 점차 그 범위를 넓혀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자전거를 꺼내 강북에서 강남으로 내달렸고, 평소에는 타지 않는 마을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여행을 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을까, 마음먹기 따라 이미 익숙한 일상이 새로운 외국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다른 동네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고, 그러다 내 곁에 우연히 있게 된 사람에게는 인사를 건넸다. 세상 모든 사람은 여행자에겐 평소보다 훨씬 따뜻했고, 넓은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 사이 나는 음반기획사 직원에서 작은 스타트업의 대표가 됐다. 멀리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깊은 휴식과 낯선 교감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2017년 출간한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에 소개됐던 세계관이 이제는 일이 된 셈이다.
남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줘야 하는 직업인 만큼 여전히 스스로에게도 좋은 리프레시를 선물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내 일을 하니 이전보다 휴식 시간을 내기 더 어렵고 오히려 퇴근이 없어진 삶을 살고 있다. 하루는 직원에게 작은 투정을 부렸다.
“에휴,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은 언제 살아보는 걸까?” “저녁이 있는 삶이 별건가요? 이렇게 밥 먹고, 동네 산책하는 지금 이 순간이 저녁이 있는 삶이지요.”
그 순간 나의 보물 ‘작은 여행’이 다시 삶에 찾아왔다. 나를 지키기 위해 매일 밤 주문을 걸던 ‘작은 여행’의 달콤함을 그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힘들게 일하는 직원이 이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거래처 미팅을 다녀오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인적이 드문 밤거리를 걸으며 한강의 냄새를 맡고, 여름의 향기를 느끼는 일. 우연히 마주친 강아지와 가로수 잎사귀에 미소 주기. 지금 여기 여전히 뛰고 있는 나의 호흡을 천천히 내뱉으며 나를 느끼기. 이런 여행법 덕분에 나는 더 작은 나노 단위의 여행자가 됐다. 코로나19 때문에 서로를 경계하고 우울해지기 쉬운 지금 내 주변의 아름다움에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머물고,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챙겨보는 일. 삶의 사랑과 여유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여행방식이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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