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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너머의 비거니즘
홍산 사진작가 2020년 11월호



비거니즘(veganism)이 유행이다. 메이저 뉴스에서도, 트렌드 매거진에서도 비건(vegan)의 삶에 대해 다룰 만큼 대중화됐다. 비거니즘이란 단어를 글자 그대로 사용하기 전에는 번역가들이 비건 혹은 비거니즘을 ‘엄격한 채식’으로 의역했다. 하지만 비거니즘은 식생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동물착취를 하지 않으며 뭇 동물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다.
비거니즘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건 깃털째 그라인더에 빨려 들어가는 닭과 병아리들의 비디오를 보고나서부터다. 인간의 향락만을 위해 태어나고 쓸모에 따라 분류돼 잔혹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거니즘에 처음 눈을 뜨게 되면 ‘비건’ 라벨이 붙은 모든 것에 눈이 돌아가서 ‘비건소비’를 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비건 베이커리, 비건 패션, 비건 문구류(!)…. 모든 ‘비건’ 라벨이 붙은 제품을 소비하는 행위는 내가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을 사는 것과도 같았다.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 SNS에 올리는 모든 이미지까지도 - ‘나는 이렇게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고, 신념에 따라 가치소비를 하는 사람이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비건 제품은 신념이라는 부가가치가 붙기에 굉장히 비싸다. 비건 메뉴를 내세운 식당의 한 끼 평균 가격은 1만 원 초중반대다. 소비자들이 페미니즘, 퀴어, 에코프렌들리와 같이 가치소비되는 제품들에 신념을 이유로 가성비를 따지지 않고 잉여의 비용을 지불하듯, 비건 제품 역시 비슷한 가치소비 양상을 띠게 된다.
비건 라벨을 소비하는 삶을 살다 보니 여러 장벽에 부딪히게 됐다. 일단 나의 수입 안에서 비거니즘이라는 부가가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비건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것도, 비건 패션 브랜드의 제품을 사는 것도 내 귀여운 월급으로는 불가능했다. 또한 구매 후 사용하지 않아 쌓이게 되는 비건 제품들을 보며 이것이 과연 비거니즘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공존을 위한 방법인지에 관해 의구심이 들었다. 다수의 비건 제품들 역시 석유를 사용해 만들어지고 그것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또 다른 탄소발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품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쓰레기가 될 때, 이는 생태계에 또 다른 위협이 된다.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인 비거니즘은 비(非)소비다. 비건의 삶은 잉여의 것들을 소비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동물착취로 생산되는 것들을 비건의 방식으로 생산하는 대안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비거니즘은 사치소비를 하지 않는 것, 기 생산된 제품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비거니즘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생필품 이외의 물건을 사기 전에 하루 숙고하는 시간을 둔다. 이게 꼭 필요한 건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물건 중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없는지 고민한다. 외식의 빈도를 줄이고, 배달앱을 끊었다. 그리고 시장에서 싱싱한 채소를 구매해 직접 요리한다. 직장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포장 용기 쓰레기도 줄이고, 남기는 음식도 줄이고, 또 내 손으로 직접 식자재를 다루며 차원이 다른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드립커피 세트를 구매하고 테이크아웃 커피 구매 빈도가 줄었다. 또 가을 겨울 겉옷은 구제 상품을 구매해 입는다.
비거니즘은 끊임없는 소비로 이뤄진 삶을 유지하기에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쉬운 일상의 철학이다. 비거니즘을 접하고 실천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왜 비거니즘을 실천해야 하는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열심히 고민하고 도전하며 대안의 삶을 구성해나가야 한다. 모두의 개인적인 비거니즘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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