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상(玩賞)은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즐긴다는 뜻이다. 즐긴다는 것은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이 여러 장면으로 가득 채워지며 풍경이 된다. 자연만이 풍경이 아닌, 즐기는 풍경으로서 모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라이프스타일이 지속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장 가까운 내 영역부터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스스로 방을 수리하고 정리하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높아졌다. 아파트를 답답하게 느끼며 내 집 짓기를 꿈꾸는 가족이 늘었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집은 여전히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개발과 투기,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어 다시금 나와 가족을 중심으로 거주와 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기도 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주거공간에서도 ‘생활 속 거리’를 조절할 수 있어야겠다. 집의 가치는 ‘공간’의 넓이가 아니라 ‘편안함’의 넓이에서 나온다. 가능한 한 가변적이고, 확장성을 갖고,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자유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한 거리감을 통해 안으로 열리고 밖에서 에워싸는 풍요로운 내외부 공간. 하나의 집 안에 다양한 공간이 차례차례 겹쳐 있어 시선을 돌리면 사계의 변화, 계절의 냄새, 바람과 빛의 음영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 거저 다가오는 자연을 잘 받아들여 안온감(安穩感)을 느끼고, 철마다 변하는 자연과 교유(交遊)했으면 좋겠다.
집을 완상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흔히 집은 변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있다. 인테리어는 바꿀 수 있어도, 구조는 한번 세우면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집에 사람을 맞추는 게 아니다. 공간의 크기와 넓이 등 규모에 집중하지 않고, 편안함과 불편함, 삶과 일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가치에 집중하면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편리한 공간이 꼭 편안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거공간에 불편한 부분이 있어야 편안함이 더 극대화되고, 또 그것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의 변화 가능성’이다. 쓰임새에 따라 변화 가능한 공간과 고정적인 영역을 분리해 기능을 한데 모으고, 가구 등을 활용해 자유로운 평면을 구성함으로써 내용물을 담는 용기가 아닌 그 용기의 주체가 되어 어포던스(affordance; 어떤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가 가능한 느슨한 공간을 상상해 보자.
거실과 부엌의 공간이 애매해지면서 부엌이 거실이 돼 접대와 생활의 공동영역으로 경험의 범위를 확대한다. 생활패턴에 따라 가변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가구로 인해 식당이 되고, 응접실이 되고, 거실이 된다. ‘집’에서 ‘방’이라는 개념으로 좀 더 내밀하게 들어가 보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공간을 유동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짐’도 적어야 한다. 취향과 기호를 반영하려면, 가구에 의한 기능적인 공간에서 가구와 가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기대해 보자.
그렇게 하면 거주하는 사람의 삶에 맞춰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되지 않은 기호의 공간이 된다. 한번에 읽히는 공간배치로 제한적인 공간이 아닌, 어떻게 생활해도 유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방의 사면을 감싸고 있는 책상, 옷장, 침대, 수납장을 테트리스처럼 효율적으로 두는 것에서 벗어나 보자. 내 방을 정의할 때 그림만을 걸어두는 벽, 누웠을 때 하늘을 상상할 수 있는 천장,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식물이 놓인 바닥 등 자신에게 작게나마 ‘상징적 자리’를 만들어주자. 소설가가 글을 쓰기 위해 거치는 고뇌의 과정처럼, 건축가가 집을 짓기 위한 일련의 단계를 밟는 것처럼, 건축주도 사계의 변화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걷다가 잠시 머무르고, 다시 걷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저 즐기다 보면 스스로가 그 자체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