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중 포로가 된 군인들, 탈출을 시도하다 섬에 표류한다. 자급자족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보일러도 직접 만들어 쓴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지구의 석탄이 바닥나면 어쩌지요?” 만물박사로 통하는 사이러스가 답한다. “언젠가 물이 연료로 사용될 날이 오리라 믿네. 수소와 산소로 전기분해된 물이 에너지를 공급해 줄 걸세.”
1874년 소설가 쥘 베른이 쓴 『신비의 섬』에 나온 이야기다. 수소경제는 이렇듯 상상과 과학의 만남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의 융합이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통하는 ‘길’이다. 수소경제 자체가 종착지라기보다 사람이 자연 그리고 기술과 어우러져 궁핍하지 않으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경로다.
수소연료전지 시설을 여기저기 세우고, 수소충전소가 곳곳에 보이고, 수소전기차가 휘발유차를 압도하는 것을 수소경제라고 규정짓는 순간 정부도, 기업도, 지자체도 일단 시설을 짓는 데 급급해진다. 꼭 사용할 필요도, 사용하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낯선 시설을 반길 이유가 없다.
설문조사와 언론 네트워크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수소를 더 많이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수소 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은 싫어한다. 그렇다고 님비(NIMBY)로 몰아붙이기만 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시설이 집 근처에 만들어지면서 내 삶이 별로 나아지지도 않고, 실제 위험한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소리는 들리고, 이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문화적 수용성을 시설의 당위성만으로 강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외의 보너스를 덕지덕지 붙이는 건 안 될 일이다. 사람들이 환영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을 만들고, 사람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부는 수소를 활용처가 다양한 친환경에너지이자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에너지저장 수단으로 규정하면서 수소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경제 선도국가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수소차와 연료전지의 세계시장 점유율 1위 달성과 화석연료 자원빈국에서 그린수소 산유국으로의 진입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2022년 수소차 8만1천 대, 수소충전소 310개소, 연료전지발전 1.5GW, 건물연료전지 50MW, 수소공급 연간 47만 톤, 수소가격 kg당 6천 원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와 닿질 않는다.
거대한 선언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거나, 단순한 수치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진짜 수소경제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국민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수소경제가 무엇을 의미하며, 왜 우리가 실현해야 하는지, 도전을 하지 않으면 미래사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학교에서, 주민센터에서, 기업에서, 각 단체에서 적합한 형태로 시작할 수 있도록 사회적 대화의 플랫폼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화를 지자체로, 국회로, 사회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얼마든지 대화방식을 다양화할 수 있다. 디자인과 운영을 책임질 총감독은 필요하다. 민간 싱크탱크가 해도 좋고, 언론이 맡아도 괜찮다. 권력 행사나 의도적 의견몰이를 하지 않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책임을 맡을 수 있다.
또 한 축에서는 메타버스(metaverse; 가상세계에서 실제 현실의 이벤트를 아바타를 통해 경험하는 세상)를 활용해 수소도시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의 일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회문화적 수용성을 확산하는 동시에 수소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미래사회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수소경제는 미래사회를 만들어가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사회적 수용성 확보에 앞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