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가 통상협정 안에 노동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이하 노동조항)를 도입한 것은 1995년이다. 그러나 현대적 노동조항의 틀을 구축한 첫 무역협정은 한·EU FTA로, 주요 특징은 이렇다. 첫째, 협정의 노동조항은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닌 법적 의무를 창설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협정 당사국의 국내 노동법을 실효적으로 집행할 의무는 물론, 국제기준에 따라 국내법과 관행을 정비하고, 무역·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노동보호 수준을 완화하지 않을 의무도 추가했다. 나아가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의무도 부과했다. 둘째, 노동조항의 의무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 ILO와 유엔의 여러 문서를 폭넓게 인용하도록 했다. 셋째, 노동조항 이행 확보를 위해 정부 및 시민사회 간 대화와 협력에 의존하도록 했다. 최종 분쟁해결 절차인 전문가패널이 협정 위반을 판단하더라도 승소국은 이를 이유로 협정조항에 직접 근거해 패소국에 무역제재를 가할 수 없다(그러나 노동 문제가 국제통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한 양자의 실질적 관련성은 그렇게 간단히 일소되지 않는다).
노동은 오랫동안 국내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효과적인 이행강제수단이 없는 탓에 회원국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기본적 의무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이 끝나갈 무렵 노동 이슈는 외교 문제와 통상 문제가 됐으며, 기본협약 비준 문제가 언론에서 주요하게 다뤄졌고 이는 한·EU FTA에 기인한 바가 크다. EU는 협정 제13장에 근거해 2018년 12월 17일 협의를 요청했고 2019년 7월 4일 전문가패널의 소집을 요구했으며, 2020년 10월 8~9일 온라인으로 심리 절차가 진행됐다. 협정이 발효되고 햇수로 10년째 되는 올해 1월, 이 분쟁에 대한 전문가패널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두 분쟁 당사자는 서로의 승리를 선언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지속적 노력 의무와 관련된 쟁점에 대해서는 전문가패널이 한국의 손을 들어줬고, 당시 발효 중이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일부 규정이 ILO의 결사의 자유 원리를 존중·촉진·실현할 의무에 위반된다는 쟁점에 대해서는 EU의 주장(자영업자의 단결권 제한, 조합원의 자유로운 노동조합 임원 선출 제한 등)을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EU와 한국의 노동조항 관련 분쟁은 협정의 노동조항 위반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역사상 첫 번째 사례로서 상징성이 있다. 전문가패널의 논증과 법리가 향후 관련 분쟁의 판단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분쟁이 시작된 이래 한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전문가패널 절차에 대응하는 것 외에도, 대내적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2020년 6월에, ILO 제29호, 87호, 98호 협약 비준동의안을 그다음달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법률개정안은 국회에서 다소 수정돼 그해 12월 본회의까지 통과했다. 비준동의안은 해를 넘겨 올해 2월에 통과됐고, 이에 정부는 4월 20일 ILO에 3개 협약 비준서를 기탁했다(비준은 1년 후 발효). 이러한 행보의 이면에는 EU와의 외교·통상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이 크게 자리했다.
외부의 압력이 주된 동기였기에 개정된 법률은 노동계·경영계, 전문가 등으로부터 다양한 측면의 일리 있는 비판을 받았다. 여전히 국제기준에 미달한다는 평가, 우리 노사관계 현실에 대한 세심한 고려와 일관된 원리가 결여된 협약비준용 개정이라는 시각, 명확하지 않은 법문으로 인한 법 해석·적용의 어려움 등이 대표적 예다. 제기된 문제는 앞으로 노사자치, 노동행정, 조정·심판 및 소송 등을 통해 차차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EU FTA의 노동조항과 분쟁이 우리 노동 관련 제도·관행을 국제기준에 한층 더 가깝게 만드는 모멘텀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EU와 개별 회원국 차원에서 이뤄지는 핵심노동권을 포함한 인권 실사의무(due diligence) 법제(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관련 국제기준을 준수하는 것은 이제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는 국가와 기업에 ‘출입증’이 될 것이다. 개정법률 시행을 기점으로 국가 제도만이 아닌 기업의 관행에까지 국제노동기준이 스며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