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8일 EU 집행위는 새로운 통상전략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전략의 핵심 키워드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이다. 이는 세계시장 내 장벽 없는 경쟁과 교류가 EU 및 세계경제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원칙(개방형)을 고수하면서도 EU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전략적 자율성)을 함께 반영한 결과다.
디지털, 환경 등 핵심 분야에서
국제표준 주도하려는 EU
다자주의 약화, 미·중 및 미·EU 간 무역 갈등, 디지털 및 친환경 전환, 코로나19 유행 등 대내외 통상환경 변화에 대한 EU의 대답이 바로 이번 통상전략이다. 특히 전략적 자율성은 그간 EU가 추진해 온 산업 및 통상 정책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EU 집행위는 2019년 출범 후 4개월 만에 발표한 신산업전략에서 이미 기술, 식량, 인프라, 안보 등 전략산업 부문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코로나19 유행은 역내 공급망 강화라는 기존의 움직임을 강화했는데, EU는 이번 위기를 통해 그 중요성이 강조된 제약 및 보건 분야 제품에 대한 비상시 접근성을 높이고자 의약품의 역내 생산 비중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EU의 중점 사업이었던 유럽 그린딜과 디지털 전환 등 핵심 분야에서 EU 주도의 국제표준을 마련하고 역내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강조했다. 무역관행 및 노동, 환경, 인권 등의 규범에 대한 구속력 있는 규제를 수립하겠다는 목표도 내세웠다.
이 같은 일련의 조치로 여러 가지 변화가 예상되므로 한국 정부 및 기업들의 대응이 요구된다. 우선 이번 신통상전략이 시행됨에 따라 EU 회원국 기업의 리쇼어링(reshoring) 및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유럽은 글로벌 가치사슬(GVC) 다각화와 전략산업 보호를 위해 기업 차원의 리쇼어링 정책을 지원하고 있으며, 친환경자동차 및 의약품 산업 내에서 EU 역내 기업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움직임이 이미 감지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재정난에 직면한 르노자동차에 국내 공장 생산량 증대를 조건으로 50억 유로의 긴급자금 대출을 제공했고, 이에 르노자동차는 중국 공장 생산 물량을 폐쇄 예정이던 프랑스 공장으로 옮기기로 합의했다. 또한 폭스바겐은 EU가 출자한 노스볼트와의 협업을 통해 자체 배터리 생산을 늘릴 예정임을 발표했다.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면서 지난 2월 백신 수출 제한 조치를 단행한 이력도 있다. EU 회원국 생산 물량에 대한 역내 사용 주장이 힘을 얻을 뿐 아니라 향후 원재료 및 완제품의 자체 생산량 비중도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신통상전략은 디지털 및 환경 분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예고한다. EU가 주도하는 디지털 분야 신기술의 국제표준 경쟁과 데이터 및 개인정보 관련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맞춤형 지원과 관련 법령 정비가 필요하다. 특히 EU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육성하는 로봇 공학,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E), 고성능 컴퓨팅 및 데이터 클라우드 인프라, 블록체인 등의 산업 분야에서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EU 집행위가 6월 말까지 입법안을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역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 확대가 유력하게 점쳐지는 가운데, 국내 기업의 기민한 대응이 요구된다.
무역과 지속 가능 개발 등의 조항은
실제 투자행위에도 영향 미쳐
마지막으로, EU가 환경, 노동, 인권, 젠더 등 규범과 관련된 조항 이행을 더 강하게 요구하며 일종의 무역장벽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EU FTA에서 최초로 독립된 장으로 삽입된 무역과 지속 가능 개발(TSD; Trad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장은 이후 EU가 체결하는 모든 무역협정에 포함돼 왔다. 이러한 조항은 실제 투자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6월 수출입은행과 한국전력공사 등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석탄화력발전소에 투자했다가 유럽의 연기금 운영사로부터 투자 철회 압박을 받았다. 같은 해 EU가 한국의 노동 규약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 중재 패널의 판단을 받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이 TSD 장의 조항을 실제 위반한 것으로 결론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향후 EU와의 파트너십을 이어가는 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EU의 신통상전략은 급변하는 대외환경에 맞서 EU 회원국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통상전략에서 제시한 밑그림 위에 공급망 강화, 산업정책 개편, 해외보조금 규제 강화, 외국인투자심사제도 강화 등 일련의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표〉 참고).
이러한 변화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만큼 EU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을 확대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아울러 우리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