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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유교문화 탓만 할 수 없는 나이 위계문화, 결국 우리 선택의 문제이기도
오성철 서울교대 초등교육과 교수 2023년 02월호


지난해 말 만 나이로 법적·사회적 기준을 통일하는 내용의 「민법」 및 「행정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세는 나이를 기반으로 한 위계질서가 명확한 한국에서 ‘만 나이 통일’이 법적·제도적 차원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려면, 한국에 지금과 같은 나이 위계 질서가 확립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제 시기에 조선에 존재했던 사범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학교에서 배우는 이른바 ‘공학’ 교육기관이었다. 그 사범학교는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최초의 문상 모리 아리노가 기존 사범학교를 군사주의적인 방식으로 재편한 것이었다. 군사훈련인 ‘병식체조(兵式體操)’가 정식 교육과정으로 도입됐을 뿐 아니라, 학생 전원이 군대 내무반을 방불케 하는 기숙사에서 집단 생활을 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전 학년의 학생들이 같은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생활하는 이러한 제도는 사범학교 학생 문화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하게 된다.

상급생과 하급생 간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성립했으며 그것이 상급생에 의한 하급생의 집단린치까지 묵인하는 폭력적인 학생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범학교에서 1학년은 ‘꼬마’, 2학년은 ‘자’, 3학년은 ‘사람’, 4학년은 ‘님’으로 불렸다. 무력한 하급생이 상급생의 횡포에 대응하는 방식이래야 고작 졸업식 날 상급생의 교복을 찢는다거나 축하한답시고 상급생을 헹가래치다 슬쩍 놓쳐 다치게 하는 식이었다. 경성사범학교를 다녔던 조선인 학생의 회고에 따르면 심지어 조선인 상급생이 일본인 하급생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조차 용인됐다고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는 교육과 사회의 각 영역에서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려는 시도를 했다. 조회 때 불렀던 기미가요나 기도문처럼 암송했던 황국신민서사가 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적 장치와 내용으로 대치된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상하급생 간 위계질서에까지는 시선이 미치지 못해 오랜 기간 청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나이가 위계질서의 근거가 된 역사적 연원이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몇 년간의 생물학적 나이를 뛰어넘어 지기(知己)가 되곤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면, 나이가 1년 단위로 촘촘하게 매겨지고 그것이 곧바로 위계질서의 원리로 작동하는 문화를 유교의 유산이나 가부장제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나이가 위계질서 원리로 전환된 것을 구조적으로 보면, 동일 연령 집단이 하나의 학년으로 동질화되고, 그러한 학년들이 학교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근대적 교육장치의 등장 및 확산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근대적 교육장치가 확산된 모든 곳에서 나이의 위계질서 로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근대교육의 ‘일본적’ 특질과 ‘식민지적’ 이식이라는 역사적 과정이 개입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나이가 위계질서와 결합된 역사적 연원을 따지는 작업이 자칫 문제의 모든 원인을 일제의 지배 탓으로 돌리는, 말하자면 식민 지배 환원주의적 경향으로 이어진다면 그 또한 문제다. 해방 이후에도 오랜 기간 우리 사회는 그러한 관행을 청산하는 데 일부러 게을렀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그러한 관행을 의도적으로 유지·재생산함으로써 학교에서 ‘어떤 인간’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즉 그것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 및 ‘인권의식’의 성숙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됐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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