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첼로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첼로 레슨을 하는 선생님들을 찾아 연락을 드렸는데, 하나같이 거절하셨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 난 눈과 귀에 장애가 있는데, 현악기인 첼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배울 수 있다는 이유로 레슨을 거절당했다. 다행히 지금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 어쩌면 전 세계에서 유일할지도 모르는 ‘시청각장애인 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면 집으로 두꺼운 우편물이 도착한다. 선거 공보물이다. 내게 시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점자로 된 자료와 USB도 함께 보내준다. 그런데 저시력장애를 갖고 있는 나는 점자를 배우지 않아 점자로 된 그 자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후보들의 기호가 몇 번인지, 이름과 공약은 무엇인지 읽어보려고 했지만 후보마다 기호나 이름, 공약을 적어둔 위치와 글자의 색, 글자 크기가 달라서 일일이 찾으며 읽기가 힘들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 장애인 직업능력개발원을 방문했다. 컴퓨터나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싶었다. 그곳은 장애유형별로 반을 나눠 훈련하고 있는데, 시각장애 특화반과 청각장애 특화반이 있고 시청각장애 특화반은 없다. 시각장애 특화반은 내가 강사의 말을 듣지 못하니 어렵고, 청각장애 특화반은 강사가 하는 말을 수어통역사가 수어로 통역하는데 저시력으로 수어통역을 보기 힘드니 어렵다.
그래서 시각장애 특화반과 청각장애 특화반 중 어느 하나의 반에 활동지원사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강사가 하는 말을 활동지원사로부터 큰 글씨로 문자통역을 받으면훈련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안 된다고 했다. 시청각장애 특화반이 없기 때문이다. 청각장애 특화반 교육생들이 수어통역을 보면서 훈련을 받듯 난 문자통역으로 훈련받을 수 있는데 담당자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특화반에 해당하는 장애유형이 아니라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고, 복지서비스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장애를 먼저 바라봄으로써 부정적인 생각부터 한다. 못할 거라고, 불가능할 거라고.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두 마리의 개를 많은 사람이 여전히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장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인력조차도 장애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애인복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15가지의 장애유형이 장애의 전부가 아님에도 여전히 장애를 법이나 제도에서 정하고 있는 틀에만 얽매여 생각하고 접근하고 있다.
장애에 대한 패러다임은 의료적 모델에서 사회적 모델을 넘어 문화적 모델로까지 변화하고 있다. 시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모든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의 특정 행동을 다른 자폐성 장애인도 똑같이 할 거라는 생각도 큰 오산이다. 분명 장애인인데 그에 맞는 복지서비스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정해진 제도나 틀에 맞추지 못하면 지원해 주지 않는다는 건,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있는 법과 제도의 잣대를 모든 장애인에게 일률적으로 맞추려고 하면 안 된다.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복지와 지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시각장애인이 점자가 아닌 굵은 글씨체로 된 글자를 보기 편하다고 하는 것처럼 장애인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당사자에게서 듣고, 그에 맞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당사자만큼 전문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