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최근 미국과 유럽 은행권의 위기감은 조금 잦아드는 듯하나 위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미국 연준의 금리인하를 자극할 수 있어 오히려 호재라는 입장부터 과거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본격화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재현을 주장하는 입장까지 이번 위험에 대한 평가 스펙트럼이 매우 넓게 형성돼 있어 상황을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역대 은행위기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한 걸음 들어가서 보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과 SVB, 크레디트스위스은행 사건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갖는다. 각 문제에 대해 한 축은 문제가 되는 투자자산의 가치 또는 신용도를 기준으로, 또 다른 축은 그 은행 또는 금융시스템이 유동성을 동원해 대응 가능한 규모인지를 기준으로 나눠 볼 수 있다.
SVB의 경우는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절반 이상이 신용도가 가장 높은 미국 국채로 구성돼 있다. 가파른 금리인상으로 평가손(기업과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의 가격이 하락하거나 시가가 장부가격을 하회할 때 그 차액)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불안을 야기했지만 매몰되거나 없어지는 자산은 아니다. 그러나 이 대규모 평가손이 갑작스러운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를 야기했고 이 규모가 은행이 관리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섬으로써 빠른 파산을 선언한 것이다.
반면 크레디트스위스는 2021년 3월 영국 그린실캐피털 파산과 같은 해 4월 미국 아케고스캐피털 파산이라는 명백한 투자 실패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인데, 레버리지(차입) 규모가 크고 매우 공격적이었던 투자회사들의 성향을 감안하면 이 회사들에 투자한 자금은 회수하기 어려운 매몰비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크레디트스위스는 SVB와 달리 상당한 규모의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손실은 대응 가능한 규모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점 때문에 크레디트스위스는 스위스 정부의 지원으로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에 전격 인수될 수 있었다.
2008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의 경우는 이 두 은행 사례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중첩된다. 금융상품의 기초가 되는 부동산 부분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 부동산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투자가 매우 높은 레버리지를 통해 이뤄짐에 따라, 문제가 된 투자자산 대부분이 부실자산으로 처리되며 매몰됐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파생상품을 통해 모기지기관과 여러 글로벌 금융기관이 서로 얽힌 투자 행태로 인해 자산규모 최상위에 있는 은행들마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손실 규모가 커졌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응에서도 2008년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전격적인 합병 결정 등 정부의 대처가 매우 빠르고 적극적으로 이뤄졌을 뿐 아니라 연준도 새로운 유동성 지원책인 은행 기간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 은행권의 대응능력이 크게 개선된 것도 고려할 사항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정책당국의 금융기관 건전성 기준이 높아짐에 따라 대형은행들의 기본자본비율(Tier 1)은 당시 7%대 중반에서 지난해 말 기준 14.9%로 크게 높아져 있다. 현금이나 지급준비금처럼 은행이 인출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유동성 자산 비중도 2008년 6% 선에서 현재는 19% 수준에 이른다.
현재 글로벌 금융시장의 기조적인 흐름은 이를 반영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행 간 자금흐름과 유동성 여건을 보여주는 지표인 리보-OIS 스프레드나 테드 스프레드 등은 2008년 금융위기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안정적인 은행 간 자금지표는 은행권 자금흐름이 지난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와는 달리 아직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