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현재 세계 벤처금융시장의 대표 롤 모델이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한 지 어언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SVB가 파산한 직후에는 SVB 파산이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의 신호탄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고, 유럽에서는 글로벌 시스템 중요은행(Global Systemically Important Banks) 중 하나인 크레디트스위스은행에 위기가 찾아오며 UBS로 인수합병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 금융위기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2008년 금융위기 땐 주요국 국채금리
급상승했으나 이번엔 급하락 추세 보여
은행이 마주하고 있는 위험은 크게 신용위기와 유동성위기로 나뉜다. 은행은 가계나 기업의 여유자금을 저축 형태로 받아 자금이 필요한 기업, 정부 혹은 다른 가계로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은행의 자금운용에 기반이 되는 가계나 기업의 저축은 가계나 기업이 은행에 빌려준 돈이며 은행이 갚아야 할 부채다. 그런데 은행이 빌려줬던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은행 자신도 가계나 기업에 저축의 형태로 빌렸던 돈을 갚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이 신용위기다.
한편 가계나 기업이 은행에 저축할 때, 즉 자금을 빌려줄 때 정기예금과 같이 일정 기간 찾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요구불예금과 같이 언제든지 요구할 때 다시 인출할 수 있는 형태의 계약을 맺는다. 반면 일반적으로 은행은 자금을 빌려줄 때 만기가 되기 전까지는 상환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 은행에 저축했던 가계나 기업의 인출 요구가 집중되면 은행은 이에 대처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 금융기관이 숙명적으로 갖고 있는 유동성위기의 본질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주택금융시장 중 하나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서 시작됐다. 과도한 신용팽창으로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급등한 후 부동산가격의 하락이 시작되자 대출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된 차입자들의 채무불이행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들에서 손실이 발생하자 시장의 신뢰가 훼손되며 단기자금시장의 경색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미국 내에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확대됐다. 신용위기가 촉발한 위험의 대표적인 예다.
반면 최근 SVB의 파산 과정을 살펴보면 SVB가 보유한 자산에 대규모 부실이 발생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지난해부터 진행된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SVB가 보유하고 있던 미국 국고채의 시가평가 가치가 하락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시가평가 가치의 하락일 뿐 아무도 미국 재무부가 자신이 발행한 채권을 상환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채권을 만기까지 보유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SVB에 저축했던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몰리며 인출 요구가 급증했다. 이러한 인출 요구에 대응하고자 SVB는 부득이하게 보유한 채권을 매각하며 미실현 평가손실이 실현 손실로 전환됐다. 즉 유동성위기가 자산의 손실을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2008년 금융위기와 SVB 사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전자는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했던 것이고 신용위기로 촉발된 사건인 반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지역은행의 유동성위기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에도 큰 차이를 보인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 직후 금융시장의 신뢰가 급속도로 훼손되며 미국 국채금리는 빠르게 상승했고 유럽에서도 그리스 등 유럽 남부 국가들 위주로 국채금리의 빠른 상승 추세가 나타났다. 반면 최근 SVB 사태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국채금리는 빠르게 하락했다. SVB 사태가 세계 금융시장의 신뢰에 훼손을 일으켜 대규모 신용경색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을 고려해 금리인상 기조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강화된 은행 건전성 관리 유지했다면
SVB 사태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글로벌 금융시장에 신뢰가 유지되는 배경에는 SVB 파산이 대규모 신용위기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 유동성 관리 미흡에서 비롯됐다는 점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미국 정부와 연준의 발 빠른 대응이 있다. 연준은 유동성위기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은행 기간대출 프로그램을 통해서 국채나 주택저당증권 등의 적격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 최장 1년까지 자금을 공급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예금자 보호 한도(25만 달러)를 초과하는 예금에 대해서도 모두 지급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도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발 빠르게 시행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SVB 파산의 파급효과가 모두 마무리됐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특히 실리콘밸리와 같은 벤처기업과 신생 단계의 기업들에 대한 자금공급이 과도하게 위축될 수 있고, 이는 글로벌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부터 통화긴축이 빠르게 진행되며 주로 벤처기업에서 유동성 제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태로 벤처기업 생태계가 더욱 약화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SVB 사태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전반적인 신뢰를 훼손하지 않더라도 벤처기업 등 신생기업의 유동성 제약을 심화하고, 나아가 잠재성장률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스마트폰 등 IT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 비해 예금의 인출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 유사시 대규모 인출사태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2008년 「도드-프랭크법」 제정으로 강화됐던 은행의 건전성 관리가 2018년 「경제성장, 규제 완화 및 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률」 제정으로 일부 완화된 사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완화된 법에 따라 자산규모 500억 달러 이상 은행에 적용되던 건전성 규제가 자산규모 2,500억 달러 이상의 은행으로 한정되며 SVB도 규제가 완화됐다(지난해 말 SVB의 자산규모는 약 2,120억 달러). 만일 강도 높은 스트레스 테스트(경제위기 상황에서 발생할 손실을 측정하고 이에 대비해 은행이 충분한 자본을 축적했는지 평가하는 것)가 꾸준히 실시됐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마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글로벌 금융기관들의 유동성 및 건전성 관리를 보다 철저히 하는 동시에 벤처기업 등 신생기업들에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인 유동성 공급 방안을 찾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