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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정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가 됐으면…”
박은경 대웅제약 마케팅본부장 2023년 12월호

2021년 12월 국내 제약업계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흔히 제약업계는 남성 중심의 보수적 분위기로 알려져 있으나 견고해 보였던 ‘유리천장’을 깬 업계 최초의 30대 여성 임원이 나온 것. 그 주인공은 박은경 대웅제약 전문의약품 마케팅본부장이다.

박 본부장은 올해 GPTW(Good Place To Work)코리아가 선정한 '혁신리더'로 꼽히기도 했다. GPTW 혁신리더상은 뛰어난 업무성과를 올리고 현장에서 일하기 좋은 일터 만들기를 선도한 구성원에게 주어진다. 그만큼 사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역량을 인정받은 것. 

이변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달려왔는데 도달한 당연한 파격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파격이 가능했던 대웅제약의 인사·직무 시스템과 박은경 본부장의 성공담을 들어봤다.


입사 10년 차에 제약업계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됐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 과정이 궁금하다.
보수적인 제약업계에서 30대 여성이 마케팅이나 세일즈 조직에서 임원이 된 경우는 내가 처음이라더라. 2010년 마케팅 부서 인턴으로 입사한 후 프로덕트 매니저(PM)의 보조업무 2년, 병원 등을 방문하는 영업 부서 2년 6개월을 거쳐 마케팅 부서 PM이 됐다. 그 후 성과를 인정받아 팀장이 됐고 마케팅 분야에서 순차적으로 성장했다. 영업 부서에서 일할 때는 하루에 15곳 정도의 병원을
방문하며 현장을 익혔다. 내성적인 성격에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지만, 관계가 지속되고 신뢰가 쌓이며 어려웠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다. 개인의 노력에 더해 회사 직무급제도 덕분에 본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직무급제도는 어떤 제도인가.
기존 연공서열식 직급 인사체계에서 벗어나 성별, 연령, 국적에 상관없이 오직 역량만으로 평가하는 제도로, 2016년에 대웅제약에서 업계 최초로 시행했다. ‘직원의 성장이 곧 기업의 성장’이라는 회사 경영철학에 기반해 모든 인사제도가 직원들의 성장을 위해 제도화됐다. 직원을 성장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자리를 주고(본인 머리보다 큰 모자를 씌워주는 것), 직원이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존 직급체제에서는 차·부장급만 팀장이 될 수 있었지만 직무급제의 경우 역량이 되는 직원 모두에게 팀장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반면 역량이 부족하면 다시 팀원으로 내려보내서 필요한 역량을 더 쌓도록 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직무급제에서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평가시스템이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 연공서열 중심의 직급제에서 직무급제로 전환되던 3~4년간의 시기에 성과는 지표화할 수 있었으나, 역량에 대해 누구나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어떻게 공정하게 평가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부서별로 사업 상황과 직무에 맞게 직무역량의 정의와 평가기준을 체계화했다. 실제 직무급제에 기반해 성공적으로 성장한 직원 사례를 적극 발굴하고, 일 잘하는 방법을 매월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직무급제의 성공사례를 적극 홍보하면서 해당 제도의 필요성과 공감대를 내재화한 결과 직무급제가 안착할 수 있었다.

역량 중심의 평가시스템만으로 유리천장을 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외에도 일하는 시간과 장소·방법을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스마트오피스, 재택근무 등 직원들이 여건에 맞춰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직장인에게는 일 못지않게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도 중요하다. 이에 ‘휴가 사유 묻지 않기’ 캠페인, 5년 근속 직원 대상 최대 1개월의 ‘유급 장기 리프레시 휴가’ 등 직원들이 제대로 쉬고 일터에 복귀할 수 있는 제도도 운영 중이다. 또한 2011년부터 사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육아휴직을 활성화하는 등 가정 친화적인 제도가 안정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런 자율적인 업무환경과 가족 친화 제도가 육아를 병행하며 내 역량을 펼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제도가 직장 내 성평등 개선에 도움이 되고 있나?
우리 회사는 성별과 상관없이 성과와 역량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것이 정착돼 제도 차원에서 여성 또는 남성으로서 성장에 제한을 느끼는 직원은 없을 것이다. 다만 육아휴직이 필요한 시기에 여성의 휴직비율이 높다 보니, 결국 진급에서 남성보다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실제로 우리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하는 직원은 24%인데, 여성은 대상자의 79%가 육아휴직을 사용 중이다. 일하는 여성은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 부서에서만큼은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을 적극 권장하고 있고, 현재 두 명의 남성 직원이 육아휴직을 하고 있다.

직원들을 위한 이런 다양한 제도를 다른 기업들이 벤치마킹한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에서는 주로 앞서 설명한 직무급, CDP(직원이 원하는 부서를 지원·경험함으로써 인사이트를 강화할 수 있는 경력개발프로그램), 월별 피드백(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향성과 전략을 상사들이 지속적으로 코칭해 주는 제도) 등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다른 업종 관계자분이 우리 회사의 인사제도를 배우고 싶다는 연락을 해온 적도 있다. 그러나 제도의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최고경영자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없이 제도만 도입해서는 실효를 거두기가 어렵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인재가 사회적·경제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국가 차원에서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여성에게 여전히 육아가 전적으로 전가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단기적으로는 최소한 정부와 회사 차원에서 남성이 육아휴직 제도를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제도가 활성화됐으면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성별 육아분담을 권장하는 분위기 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소개한 우리 회사의 제도가 사회적 차원에서 더 논의되고 확산하길 바란다. 개인의 입장에서 국가정책 차원의 담론을 논하기 어렵지만, 성평등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더 이상 성평등이란 말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꿈꾸는 여성 후배, 동료들에게 한 말씀 한다면.
회사의 제도가 큰 힘이 됐지만, 나 역시 친정엄마의 육아 지원과 남편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지금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육아와  일을 해내는 직원들을 보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 일과 가정에 책임을 다해 임하고 있는 분들은 이미 목표로 한 위치나 꿈을 이룰 힘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시기도 결국 지나갈 것이기에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하지 말고, 본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어붙여 나가길 응원한다.   
 
이정미 KDI 경제정보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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