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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의무는 사회 모두에 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2024년 02월호


 
‘No Health without Mental Health’ 캠페인을 수년간 해온 영국은 외로움부 장관, 자살예방 장관을 둬 국민의 정신건강 문제에 국가가 적극 개입하고 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 교수는 이 사례를 들며 우리나라의 정신건강 돌봄체계도 그렇게 전환돼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정신과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데.
2005~2006년에 정신과 외래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내원한 경로를 조사해 봤다. 당시만 해도 응답자 중 70%가 가족 또는 의사의 권유였다. 그런데 최근 같은 조사를 했더니 본인이 원해서라는 응답이 70%에 달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정신과 방문자 수가 40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은 전보다 쉽게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됐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만큼 우울, 불안을 느끼는 국민이 이렇게나 많아졌다는 뜻 같아 걱정도 된다.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 불안, 불면, 치매 등과 같은 질환은 고도 산업사회로 진입한 선진국에서 많이 발견된다. 과거 봉건사회, 농촌사회에서 조현병 환자가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다는 WHO 보고도 있다. 마을과 이웃, 가족이 그 환자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모두가 돌봤기 때문이다. 산업사회를 지나 핵가족화·개인화가 확산하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학교와 일터, 삶에서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려워질 정도로 사회적인 고립이 발생한 거다.

개인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는 뜻인가.
복지국가로 알려진 북유럽도 1980년대에는 우리보다 자살률이 높았다. 당시 핀란드는 자살 사망자를 심리부검해 이들이 정신건강에 강한 편견을 갖고 있었고 우울증 환자의 경우 제대로 치료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정부는 정신의료서비스 접근성을 높이고 탄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현재 핀란드의 자살률은 우리의 절반 수준도 안된다. 덴마크도 언제든 정신과 전문의와 전화로 상담할 수 있는 핫라인이 마련돼 있고 주치의에게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진찰받을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주치의가 전문의에게 진료를 의뢰할 수도 있다.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편견 해소도 필요해 보인다.
어느 나라에서나 중증 정신질환자는 전체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위험군 중 중증 정신질환자 비율은 일반인보다도 낮다. 그러나 ‘진주 방화 사건’이나 ‘서현역 사건’처럼 아무 잘못도 관계도 없는 사람이 피해를 본 사례는 사회적으로 각인 효과가 큰 탓에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최근 중증질환자 관련 사건을 살펴보니 대부분 혼자 혹은 노부모와 살고 있어 조기에 치료받지 못하거나 방치되는 환경이었다. 이제 정신건강 문제를 개인과 가족에게 맡기는 시대는 지났고 사회시스템이 나서야 한다. 증상이 악화됐을 때 응급 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고 언제든 공공에서 치료받을 수 있으며 회복을 위한 서비스가 충족된다면 편견이 사라질 것이라 본다. 편견의 원인은 질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정신건강 의료복지시스템의 부족에 있다.

결국 사회의 혁신이 필요하겠다.
그렇다. 치료의 혁신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고, 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줄 필요가 있다. 또 사회지도층, NGO, 민관 등이 협력해 “누구나 정신건강이 무너질 수 있고,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자”라는 사회메시지를 확산해 인식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더 나아가 중증 정신질환자를 입원 등 사회로부터 격리할 것이 아니라 서구처럼 퇴원 후 지역사회에서 중장기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국민의 정신건강 문제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은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정신건강 문제로 발전하는 데도 단계가 있나?
물론이다. 우울, 불안, 분노는 나를 보호해 주기도 하고 성장하게 만들기도 하는 감정이지만, 이 감정으로 너무 고통스럽다면 정신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땐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대화하거나 클리닉 등을 방문해 상담받는 게 좋다. 이보다 더 심각한 조현병 등 중증 정신질환이라면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중증 질환의 경우 여러 연구를 통해 뇌 질환 등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약물치료를 하면서 정신치료 및 재활프로그램을 시행하면 회복에 훨씬 더 효과를 볼 수 있다.

정신건강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딱 하나만 꼽으라면 불면증이다. 불면증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방법 중 1위가 ‘잠’이다. 그런 잠을 잘 자지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커지지 않겠나. 물론 모든 불면증 환자가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 번쯤 심리검사를 받아보는 것을 권장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1577-0199)를 통하면 정신건강 전문요원과 무료로 상담할 수 있는데, 이때 개인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인지 병원에 갈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또 가족이 아플 때도 상담받을 수 있다. 상담기록은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 개인정보 유출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국내 정신의료기관으로는 어떤 곳이 있는가.
1차 의료기관에 해당하는 클리닉은 우울, 불면, 치매 등 정신질환에 대한 정신·약물 치료를 외래로 하는 곳이다. 2차는 정신전문병원인데 입원과 외래를 같이 운영하는 곳으로, 자의로 입원하는 개방병상과 자살 고위험 우려가 있을 경우 응급·비자의적 입원이 가능한 보호(폐쇄)병상이 있다. 3차는 (상급)종합병원으로, 응급실과 단기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상도 갖춰져 있다. 신체·정신 질환이 동반될 경우 이 3차 병원으로 가야 한다. 한편 앞서 말한 1577-0199로 전화하면 시군구에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전문요원이 받는다. 또 중증 정신질환, 자살 고위험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하면 가정 방문이나 전화상담뿐 아니라 치료 연계, 치료비 지원 등 여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연결도 해준다.

교수님은 힘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여러분과 똑같다. 환자를 보는 데 영향을 줄 정도로 스트레스가 클 땐 동료, 스승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완벽한 정신건강을 가진 사람은 절대 아니다(웃음). 필요하면 도움도 받고 그걸 통해서 성장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앞으로 어떤 사회가 되길 바라시나.
일본 「자살예방기본법」에 ‘자살로 내몰리지 않는 사회를 목표로’라는 구절이 있다. 자살 위기에 빠진 국민을 구조할 의무는 사회 모두에 있다는 의미다. 국가와 의료체계뿐 아니라 주변의 관심과 참여가 있어야 사회의 안전그물망이 촘촘해질 수 있다. 그 일환으로 ‘생명지킴이 교육’이 만들어졌다. 그간 약 500만 명의 국민이 자살위기자를 발견해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하는 게이트키퍼가 되고자 이 교육을 받았다. 올해부터는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자살예방 교육이 의무화된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우리는 그간 정신건강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 결과 삶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사람이 점점 늘어 자살률 1위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젠 신체건강과 함께 마음건강에도 관심을 가질 때다. 지난해 비벡 머시 미국 의무총감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팬데믹 수준으로 심각한 위기라고 했다.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함께 마음건강을 살펴보고 주변도 돌아봐 준다면 사회가 한층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정아 『나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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