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란 단순히 주식 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한 기업의 경영 개선도 요구해 적극적으로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펀드다. 국내에 행동주의 펀드 개념이 알려진 계기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타이거펀드, 소버린, 칼 아이컨, 엘리엇 등의 외국계 펀드가 각각 SK텔레콤, SK, KT&G, 삼성물산 등을 상대로 경영진 교체, 자회사 매각, 합병 반대, 특별 배당 등을 요구하면서부터다. 이는 한국 자본시장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으나 국내 재벌, 은행, 민영화된 옛 공기업 등에 대한 외국계 펀드들의 이해도가 떨어져 지배구조 개선 의제들이 그리 날카롭지는 못했다. 또 ‘흡혈귀 해외자본’, 즉 배당이나 단기 차익만 얻고 빠지는 소위 ‘먹튀’ 집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여론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했다.
노하우 쌓이고 있는 토종 행동주의 펀드,
외국계 펀드는 놓친, 한국적 맥락에 맞는 개선 방안도 제시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시초는 2006년부터 약 6년간 운용된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다. 이후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한동안 공백기를 보내다 2018년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CGI)가 등장한다. KCGI는 2019~2022년 한진칼 지분을 보유하면서 기업지배구조 헌장 제정,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된 보상위원회 설치 등 지배구조 개선에 일부 성과를 냈고 지분 보유기간 동안 한진칼 주가도 상승했다.
다만 KCGI는 한진칼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동안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에 대항하기 위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반도건설 등과 ‘제3자 주주연합’을 구성해 경영권 분쟁을 벌이며 인수합병 전문 펀드인지 행동주의 펀드인지 혼란을 준 측면이 있다. 또한 지난해에는 오스템임플란트에 공개 주주서한을 보내는 등 주주행동에 나섰지만 갑자기 유니슨캐피탈 등 사모펀드의 오스템임플란트 공개매수·인수가 진행돼 불가피하게 주식을 매도, 두 달 만에 주식을 정리해서 먹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 국내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별 거버넌스 개선안은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진화를 보여준다. KCGI는 지난해 DB하이텍에 보낸 주주서한에서 DB하이텍 주가 저평가 원인으로 지배주주의 사적이익 추구, 불투명한 경영, 내부통제 미비, 무시되고 있는 주주권익을 지목했다. 이는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노하우가 쌓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내 재벌 거버넌스의 핵심 문제인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를 저평가의 본질로 지목하는 것은 아직까지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는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킨 김준기 DB그룹 창업회장은 퇴사해야 한다”는 제안은 위원회 설치 등 형식적인 거버넌스 개선방안보다 훨씬 의미 있다. 일반주주의 피해가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지배주주를 제외한 일반주주들만의 표결, 집중투표제 도입, 자사주는 매입 후 즉시 소각 등 한국적 맥락에 적합한 개선 방안도 제시했다.
또한 KCGI는 현대엘리베이터를 대상으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사내이사직 사임을 요구했는데, 그 근거가 국내 재벌에서 반드시 개선돼야 하는 현 회장의 과다한 수준의 겸직과 높은 연봉, 이해관계 상충 등의 문제였다. 현 회장은 현대아산, 현대무벡스,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등 여러 계열사 사내이사를 겸직하고, 이사회 참석률이 저조함에도 여러 계열사로부터 지난 3년간 120억 원의 보수를 받았다. 그리고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홀딩스가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회사의 상근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는 것은 심각한 이해관계 충돌의 우려가 있음을 KCGI는 지적했다.
또 다른 토종 행동주의 펀드인 얼라인파트너스의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에 대한 문제 제기도 주주제안의 좋은 선례다. 얼라인파트너스는 2022년 3월과 8월에 SM에 공개 주주서한을 발송하고 SM과 라이크기획의 음반 관련 자문 및 프로듀싱 계약을 문제 삼았다. 이 거래가 국내 재벌의 전형적 문제인 지배주주 개인의 100% 소유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이기 때문이다. 이후 카카오가 SM 인수에 뛰어들면서 당시 이수만(지배주주) 측에서는 카카오·얼라인파트너스를 적대적 인수합병 세력으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늑대떼 전략’으로 규정한 것이다. 늑대떼 전략이란 여러 적극적 투자자가 모여 한 기업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연합하지만 규제를 피하기 위해 느슨한 연합을 하는 것을 지칭한다.
비재벌에 대한 행동주의 펀드 활동으로는 얼라인파트너스의 은행에 대한 문제 제기를 들 수 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국내 은행들의 만성적인 저평가를 지적하면서 주주가치 제고 활동을 전개했는데, 여기서 지배주주가 없는 국내 은행의 핵심 문제인 ‘제국건설(규모 위주의 경영과 회장의 절대권력 참호 구축)’을 지적하면서 자본효율성 제고를 이슈화해 시장의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반대로 지난해 안다자산운용은 민영화된 공기업인 KT&G를 상대로 인삼사업 부문 인적분할(기업이 분할할 때 기존 회사의 주주들이 일정 비율대로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의 주식을 나눠 갖는 것) 후 재상장 등 과감한 주주제안을 했지만 기업가치 제고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시장의 반향을 얻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인적분할 후 재상장은 주주행동주의의 의제로서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생소했던 것이다.
한편 해외에서 행동주의 펀드는 제국건설을 하는 기업에 개입해 효율성과 주주가치를 증진하는 경우가 많은데, 행동주의 펀드 개입으로 인해 타깃 기업은 대규모 문어발 확장을 줄이고 다양한 매각도 수행한다. 행동주의 펀드는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데 우선 제국건설에 책임이 있는 최고경영자를 교체하고, 성과연계 보상을 강화하고, 새로운 이사회 멤버를 선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해 제국건설을 견제한다.
행동주의 펀드가 먹튀 펀드라는 평판을 받을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과가 필요하다. 주주와 시장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의제를 선정하고 성과를 쌓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기 주가 상승에 의한 차익만 보고 실질적인 거버넌스 개선을 이루지 못하면 먹튀라는 비판이 계속 따라붙을 것이다. 그리고 늑대떼 전략은 국내에서는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다. 재벌 지배주주의 직간접·우호 지분이 50%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협상력을 갖고 일정 정도의 거버넌스 개선 효과를 거두려면 다른 펀드와의 연합은 필요하다.
‘먹튀’ 펀드 오명 벗기 위해선
실질적 거버넌스 개선 등 성과 필요
또한 주가와 관련해서는 거버넌스 개선을 통해 대단한 중장기 상승 모멘텀을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중장기 하락 모멘텀은 막는 것이 행동주의 펀드의 역할이기도 하다. 현대차의 삼성동 한전부지 구입,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기업이 분할할 때 주주가 아닌 기존 회사가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의 주식을 소유해 기업주주권, 경영권을 갖는 것)은 주가의 중장기 하락 모멘텀을 만들었다. 카카오페이 경영진의 스톡옵션 먹튀와 남양유업의 여러 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좋지 않은 지배구조에 의한 기업가치 하락 위험을 관리하는 게 행동주의 펀드의 주요 역할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행동주의 펀드는 ESG 경영과 관련해 권고적 주주제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2022년 무려 627건의 권고적 주주제안이 제기됐었고 기후변화, 플라스틱 공해, 로비활동, 근로조건, 성별·인종의 다양성 등 안건 내용도 다양하다. 개별 기업의 특수한 환경, 사회 이슈에 대해 행동주의 펀드가 문제 제기를 하면 진정한 ESG 경영을 실현해 나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