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속철도 역사는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시작됐다. 1980년대 말부터 논의되던 경부고속 철도 프로젝트는 1992년 기공식을 거쳐 건설이 시작됐으며, 독일 ICE, 일본 신칸센, 프랑스 TGV 사이의 국제입찰 끝에 프랑스의 TGV 기술이 선정됐다. 계약 과정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기술이전이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논의됐고 차량, 전차선, 신호시스템 등이 주요한 기술이전 항목으로 선정됐다.
프랑스 현지에서 12편성, 국내에서 34편성을 제작하면서 차량 제작 기술을 이전하기로 계약했으나 원천기술의 이전이 포함되지 않아 정부는 독자적인 고속철도차량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1996년 최고속도 350km/h로 운행할 수 있는 7량 1편성의 시험 차량 제작을 목표로 하는 ‘G7 고속전철기술개발사업’이 시작됐고, 2004년 12월 HSR-350x 차량이 최고속도 352.4km/h를 기록했다. 이후 수행한 21만km의 시운전의 결과로 KTX-산천의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속철도차량기술 자립화를 위한 노력은 동력분산식 고속철도차량 개발을 위한 ‘차세대고속철도 기술개발사업’으로 이어졌다. 동력분산식 고속철도차량은 당시 세계적 추세였던 승객 수요 증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로, 이 사업을 통해 최고속도 430km/h의 HEMU-430x 차량을 제작해 2013년 3월 421.4km/h의 시험에 성공했다. 이후 2015년 12월까지 12만1천km 이상의 시운전 시험을 완료하고 KTX-이음의 상용화에 이르렀다.
이처럼 2개의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을 수행하면서 국내 고속철도차량 기술은 자립화의 기반을 다져왔다. 이 결과로 2004년 KTX 도입 당시 58% 수준에 머물렀던 고속철도차량 국산화율은 90% 수준까지 향상됐다.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이 2022년 발간한 「국토교통 기술수준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속철도차량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 독일과 일본의 87% 수준이며 기술격차는 3년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철도차량의 수출은 전동차 위주이고, 고속철도차량의 수출 실적은 전무하다. 대부분의 고속철도 프로젝트가 차량뿐만 아니라 선로 등 인프라 건설과 자금조달을 위한 파이낸싱이 포함된 단일 프로젝트로 발주되기 때문에 고속철도차량의 수출 장벽을 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철도차량은 2만5천여 개의 부품으로 이뤄지는 다부품 제품으로, 고속철도차량 기술의 자립화를 위해서는 차량시스템 제작업체뿐만 아니라 하위 부품을 제작하는 업체의 기술 자립도 중요하다. 현재 KTX 차량의 유지보수 부품 중 국내에서 조달한 부품을 사용하는 비율은 65% 수준으로 앞서 제시한 차량 국산화율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이는 3개의 철도차량 제작업체가 국내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철도시장 생태계 특성에 기인한다. 우리나라 철도차량 부품시장은 업체의 85%가 종업원 수 50명 미만이며 시장규모는 2021년 기준 약 4,300억 원에 불과해 내수시장만으로는 부품업체를 운영·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품업체가 연구개발에 투자하기가 쉽지 않고 연구개발에 성공한 제품도 사용실적이 없어 상업운행 차량에 적용되지 못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철도차량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지금처럼 철도제작사 중심의 완성차 수출에만 의지하는 해외시장 진출의 패턴에서 과감히 탈피해 국내 부품업체의 기술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2020년부터 5년간 1,700억 원 규모의 국가연구개발사업인 ‘철도차량부품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철도차량부품의 국산화를 확대하고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춘 강소기업이 육성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