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 팬클럽, 팬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개인 혹은 집단을 가리키는 이 단어들은 이제 음악뿐 아니라 스포츠, 게임, 심지어 정치에도 쓰인다. 물론 이 단어들의 쓰임새나 범위는 조금씩 다르다. 팬이 개인 한 명을 가리킨다면 팬클럽은 그들이 활동하는 특정한 공간 혹은 단체를 의미하며, 팬덤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음악에만 시선을 고정하자면, ‘광풍’이란 말을 음악에 처음 가져온 비틀스의 팬덤 ‘비틀매니아’는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존재감을 떨친 첫 팬덤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프랭크 시나트라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갖고 있던 팬층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 팬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하위문화적 특징과 그에서 파생되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활동, 팬들 간의 상호연대, 아티스트가 사라진 이후에도 수십 년간 이어지는 팬덤 자체 커뮤니티 활동 등을 두루 갖췄다. 아티스트에 종속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유의미한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팬덤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이자 소통의 창구
최근의 대중음악산업에서 비틀매니아와 유사한 강력한 팬덤을 말한다면 지난 10년간 미국 대중음악산업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팝 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가수의 반열에 오른 테일러 스위프트의 팬덤 ‘스위프티스(Swifties)’가 대표적이다. 또한 비영어권 가수로서는 최초로 세계 대중음악산업의 지형 자체를 뒤흔든 방탄소년단(BTS)의 팬덤 ‘아미(ARMY)’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스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타의 입장을 대변·옹호하고, 다른 팬덤과 경쟁하며, 때로는 스타를 지지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어젠다를 설정하고 나아가 권력이나 시스템에 맞서기도 한다. 2021년 독일 공영 라디오 채널 ‘바이에른3’의 한 쇼 진행자가 BTS를 코로나 바이러스에 빗대며 인종차별적 조롱을 했다가 아미에게 항의받았고, 결국 사과 및 프로그램 하차를 한 사태는 팬덤의 실제적 ‘힘’을 증명해 준다.
한국 대중이 본격적으로 팬 혹은 팬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은 남진-나훈아 라이벌리(rivalry, 경쟁)와 ‘오빠부대’의 원조 조용필 이후다. 남진-나훈아의 라이벌 관계가 흥미로웠던 건 팬들이 단순히 자신의 스타를 응원하는 것을 넘어 독보적 위상에 위협이 되는 상대방을 시기하거나 때로는 혐오하는 등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K팝 아이돌 신으로 이어져 최초의 아이돌 그룹 라이벌리인 ‘H.O.T.-젝스키스’를 시작으로 ‘소녀시대-원더걸스’, ‘EXO-BTS’와 같은 식으로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K팝 산업은 팬들의 열기(혹은 광기)에 기반을 둔 이 같은 라이벌 구도에 늘 호의적이며 이를 통한 음원 차트 성적 및 음반 판매량 경쟁, 콘서트 관중 동원, 레거시 경쟁 등을 성장동력으로 삼곤 한다. 라이벌리는 종종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특히 후발주자들 혹은 ‘언더독(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로 여기에서는 아직은 경쟁력이 부족한 스타를 의미)’들의 중요한 산업적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한편 조용필의 팬덤은 현대적인 팬덤의 출발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다수의 팬클럽이 자발적으로 전국에 만들어지고 이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다는 점, 조용필이라는 ‘우상’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할 뿐 아니라 그 팬덤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이자 소통의 창구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팬클럽 및 커뮤니티 멤버들은 조용필을 ‘필님’이라고 부르며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는 서태지를 ‘대장’, 신해철을 ‘마왕’, 이승환을 ‘공장장’으로 부르며 추종하고 연대하는 현대적 팬덤의 효시가 됐다.
스타 위해 기획사에 의견 내거나 고액 광고 서포트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진화
팬덤을 유지하게 만드는 ‘팬심’ 혹은 ‘덕심’의 본질은 무엇일까? K팝산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니아’, 즉 우상에 열광하는 팬이라는 개념 외에 영미권 팝에서는 찾을 수 없는 흥미로운 특징이 더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육성’ 혹은 ‘육아’와 같은 심리 기제다. K팝 커뮤니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게시물 중 하나로 ‘영업’ 글을 꼽을 수 있다. 나만 혼자 좋아하기 아까운 스타를 공유하고 싶은 심리뿐 아니라 ‘내 자식’인 스타가 남들에게도 인정받기를 원하는 독특한 욕망이 더해진 이 활동은 동아시아적인 교육·육아 문화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이는 회사가 주도하는 전통적인 프로모션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한때는 가수의 지명도나 인기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쓰였던 음반 판매량이 팬덤의 규모와 열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 지 오래다. 팬데믹과 같은 외부적인 충격 요인에도 K팝산업이 전례 없는 성장을 매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실물 음반 판매가 이를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음원을 스트리밍으로 듣는 시대에 듣지도 않을 CD를, 그것도 몇 장씩 사는 행위가 바람직한가 아닌가를 떠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소비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K팝산업이 팬덤과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 설정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티스트를 내 손으로 키워낸다는 동기와 욕망인 것이다. 첫 주 판매량을 가리키는 ‘초동’이나 음악 방송 1위에 팬들이 집착하는 건 팬들이 마치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이 키우는 아이돌에게 기록을 선사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며, 이는 성공한 아이돌을 바라보는 팬들에게 자부심으로 돌아와 ‘팬질’을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팬덤이란 스타라는 절대적인 재능을 우상시하는 광적인 존재(fanatic)라는 의미를 그 본질로 삼는다. 전통적으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와 무대 아래에서 환호성을 보내는 팬은 그 경계가 철저히 나뉘어져 있고, 대부분의 팬은 스타가 만들어낸 것들을 소비하는 비교적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K팝 팬덤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음악산업의 플레이어가 되려고 한다. 공연이 열리는 날 잠실 올림픽공원 근처에 팬들이 사비로 걸어놓은 현수막이나 배너 광고는 익숙한 풍경이 됐고, 지하철역의 아이돌 멤버 생일 축하 광고는 이제 뉴욕 타임스퀘어나 비행기 광고로까지 진출했다. 또 아티스트가 팬들이 원하는 수준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팬들은 항의 메시지를 담은 ‘트럭 총공(총공격)’을 기획사 건물 앞에서 펼친다. 이는 팬덤이 단순히 아티스트나 그들의 음악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고관여층 소비자이자 조력자인 동시에 주도권을 갖는 주체임을 말해주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