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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만병통치약…독서로 상상력 키울 독자 길러야”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2024년 12월호

 
“빨리 망하려면 잡지를 창간하고 서서히 망하려면 단행본 출판을 시작하라”는 출판계의 오랜 농담으로 말문을 연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잡지와 단행본 모두를 발간하면서 버텨낸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출판계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한 소장에게 독서인구 감소와 스마트폰 등 경쟁 매체 등장으로 위기에 봉착한 출판산업 전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처음 출판업계에 입문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대학 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83년 ‘창작과 비평사’ 영업부에 입사해 소위 출판마케팅이라는 분야를 처음 시도했다. 발로 뛰는 것 외에도 팔릴 책을 적극적으로 광고하는 등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상업주의의 화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소설 동의보감』이 400만 부, 지난해 출간 30주년을 맞이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500만 부 넘게 팔리는 등 베스트셀러가 나왔다. 그후 상업적인 책 말고 현장에서 일하는 출판 종사자가 들려주는 ‘팩트’ 기반의 출판 담론을 만들고자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했다. 1999년 2월 처음으로 출판전문지 『기획회의』가 세상에 나왔다. 초창기에는 원고료 줄 여력도 안 됐고 우리나라에 출판 담론도 형성되기 전이라 원고를 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출판 관련 문화 등을 다룬 잡지, 단행본을 보고 배워 와 직접 원고를 작성하거나 좌담 위주로 구성했다. 그렇게 25년을 버티다 보니 지난 1월 『기획회의』는 600호를 맞이했다.

현재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진단한다면?
교과서를 제외한 단행본시장은 굉장한 위기다. 출판의 구성요소인 작가와 독자 환경 모두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시장성 있는 글을 생산할 엘리트 작가가 실종되고 있다. 분절화된 지식을 자신의 언어로 통합해서 설명하는 ‘지성’이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읽을 양질의 상품이 생산되지 못하니 독서율이 계속 떨어진다. 게다가 독서보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알파세대에게 책 읽기는 인기가 없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해력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근대 이후 대학에서 가르치던 분절화된 지식을 담은, 소위 학술서는 시장성을 잃었다. 한 권에서 다루는 책의 주제는 갈수록 잘게 쪼개질 것이고 이를 설명하는 작가의 방식은 통합적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앞으로는 ‘문학개론’이라는 여러 주제를 담은 한 권의 책은 탄생하지 않고 문학개론의 ‘목차’에 있는 100개의 주제가 각기 한 권의 책들로 거듭날 것이라는 의미다. 작가라면 세분화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처음과 끝을 자신의 사유로 펼치는 책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교 수업을 토론방식으로 바꿔 독자를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티칭(teaching)의 시대는 끝났고 액티브 러닝(active learning)으로 가야 한다. 이를테면 책 한 권을 읽고 토론수업을 하면 아이들은 정답을 맞힐 필요가 없는 밸런스 게임을 하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는 바로 독서를 통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림책 뒷장을 넘겼을 때 무슨 내용이 있을까?’를 스스로 생각하며 읽으면 자연스레 문해력도 높일 수 있다.

출판 유통구조 문제도 자주 언급된다.
도서 물량의 80% 이상이 3~4개 대형서점에 집중된 구조다. 대형서점 위주로 온라인 도서 주문이 급증하면서 지역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도매 유통사(지역 총판)들이 경영난으로 사라지게 됐다. 결국 중소형 동네서점은 대형서점에 더욱 의존하게 됐고 열악한 환경에서 잡화·문구류, 로또 등을 팔면서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오던 서울 불광문고(2021년), 대전 계룡문고(2024년)와 같은 중형 동네서점이 문을 닫았다. 

유통구조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중소형 서점을 살릴 해법이 있을까?
해외 서점들의 운영 사례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미국 최대 오프라인 도서매장 반스앤드노블은 아마존 등 온라인 유통이 활성화되자 매출이 점차 줄어들며 파산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반스앤드노블은 영국 돈트북스의 성공 사례를 참고해 도서정가제 도입으로 불필요한 가격할인 경쟁을 억제하고 잡화 등으로 채우던 매대를 책 중심 공간으로 바꾸는 ‘선택과 집중’을 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직원을 채용해 큐레이션 권한을 주고 지역 관심사가 높은 책 중심으로 진열해 독자를 끌어모았다. 우리나라 동네서점도 큐레이션 기능을 강화해 독자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매대에 독자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닌 출판사가 팔고 싶은 책을 진열하니까 독자가 외면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면 인천 소래포구에 있는 ‘마중물 문화광장 샘(마샘)’은 큐레이션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기둥 한편에 상세한 책 설명과 함께 청소년이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배치했고 이는 매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와의 만남, 독서 모임 등 네트워킹을 활성화했다. 

전자책시장 상황은 어떤가.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시행착오를 통해 성인 독서인구의 20%가 전자책으로 독서할 만큼 성장했지만 아직 전자책으로 수익을 내는 상황은 아니다. 미국, 일본 등은 전자책 점유율이 30% 이상을 차지하는데, 대부분의 콘텐츠가 만화 또는 성인물이다. 예를 들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등이 1억 부 이상 판매됐는데 그중 절반이 전자책이다. 특히 전자책시장의 90%를 만화가 차지하고 있는 일본은 이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 서적과 각종 매뉴얼 책도 만화로 만들고 있다. 그나마 고무적인 점은 최근 우리나라 웹소설, 웹툰 등이 출판시장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e콘텐츠가 점점 늘어날 것이고 결국 출판산업도 전자책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본다.

AI 등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출판업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아직까지는 AI가 인간의 경쟁자가 아닌 비서 정도라고 생각한다. AI가 작성한 소설도 나왔고 많은 창작 시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소설 창작 분야에서는 인간의 창의력을 따라가기 힘들다. 다만 비서로서 기획 아이템을 내놓거나 문장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필요한 데이터를 정리하는 보조적인 역할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인력이 부족한 출판사에서는 이미 직원 대신 생성형 AI를 활용해 업무처리를 많이 하고 있다.

최근 텍스트 힙 현상이 확산되는 가운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독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작가가 되면 굶어 죽는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노벨문학상 수상 사례를 보며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도를 하는 사람도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부모들도 영어 단어를 더 외우게 하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게 하는 것보다 책을 읽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40년 넘게 잡독을 하며 살아보니 책은 만병통치약이더라. 모든 해결책이 다 책 속에 있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아이들 50명을 선발해 독서 모델 학교를 운영하고 싶다. 학생 1명당 2명의 교사가 멘토로 붙어 6개월간 100권의 책을 읽고 관련 토론, 연극을 하고 여행도 다니며 독서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발견하고 꿈을 꾸며 상상력을 키우고 그 꿈을 어떻게 실현할지를 스스로 고민할 것이다. 대학교 4년 다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웃음).  
오성록 『나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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