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1, 아들=1, 딸=1, 부인=1.5’ 대한민국 「민법」이 정한, 아버지가 사망한 경우의 재산상속 비율이다. 1991년 개정된 「민법」 1009조에 따라 모든 자녀가 n분의 1, 배우자는 0.5 더 큰 비율로 상속받는다. 그러니까 ‘자녀 간 n분의 1’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민법」상 ‘균등 상속’은 불과 34년 전에야 확립됐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민법」이 시행된 1960년부터 1978년까지는 ‘장남=1.5, 아들=1, 딸(출가)=0.25, 딸(미혼)=0.5, 부인=0.5’였고, 1979년부터 1990년까지는 ‘장남=1.5, 아들=1, 딸(출가)=0.25, 딸(미혼)=1, 부인=1.5’였다. 조금씩 개선되기는 했지만 아들, 그것도 ‘장남 우대’ 관념이 짙었고 딸은 ‘출가외인’으로 홀대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장남이 제사를 모시고 한 집안을 책임진다는 의식이 컸다. 47년 전인 1978년까지는 평생 남편과 함께 한 집안을 이끌고 키워온 부인에게 0.5만 배분됐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고려 전통 ‘n분의 1’ 상속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
외가·처가 공양과 재산상속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그런데 현재와 같은 ‘n분의 1’ 상속은 적어도 700년 전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뿌리 깊은 전통이다. 단적인 예로 『고려사』 열전에 보면 1343년(충혜왕 4년) 문신 윤선좌(1265~1343년)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너희 형제는 서로 화목하고 다투지 말라는 것을 너희들 자손에게도 가르치라”는 훈계의 한마디를 남긴다.
이러한 ‘남녀 균등 분배의 원칙’은 조선 후기인 17세기까지 이어져 가장 유명한 상속문서인 율곡 이이의 분재기(상속문서)에도 등장한다. 1566년(명종 21년) 5월 20일 율곡 이이(1536~1584년) 등 7남매(4남 3녀)가 모여 조상 제사를 위한 몫을 따로 떼어두고 남은 재산을 아들딸 구별 없이 골고루 나눴다. 3남인 이이에게는 논 8마지기와 밭 일부 그리고 노비 15명이 상속됐다. 아버지 이원수(1501~1561년)의 첩에게도 상속분이 돌아갔다.
이러한 재산 분배 원칙은 16~18세기에 걸쳐 작성된 부안 김씨 가문 소장 분재기 28점에도 나와 있다. 1581년(선조 14년) 진주 강씨 가문의 강주신(부안 김씨의 처가)이 작성한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집과 논밭, 노비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사위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강주신의 사위 김경순(부안 김씨)은 1564년 강주신의 딸과 결혼하는 날 장인으로부터 논 14마지기와 노비 1명을 받았다. 장인이 딸과 사위에게 통 큰 결혼선물을 내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경순은 처삼촌 강주보로부터도 논 16마지기를 받았다. 김경순 부부는 자식이 없었던 처삼촌까지 모시고 살았기에 그 보답으로 논을 받은 것이다.
한편 1668년(효종 8년) 부안 김씨 가문의 김명열 부부는 뜻밖의 재산상속을 받았다. 사연인즉슨 김명열의 부인(전주 이씨)은 어려서부터 자식이 없던 삼촌 댁에서 자라면서 삼촌 부부를 공양해 왔다. 훗날 혼자 남은 숙모가 조카딸 부부에게 “너희는 40여 년간 나(숙모)를 봉양하고 남편(삼촌) 제사를 정성스럽게 받들었다”라면서 선뜻 재산을 상속했다. 이것이 재산을 상속하는 명분이었다. ‘살아서 봉양[생양(生養)]’의 고마움과 ‘죽은 뒤 제사[사사(死祀)]’의 바람이 재산상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 제사는 누가 지냈을까? 장남의 몫이었을까? 『경국대전』은 “조상 제사를 지내는 자가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 받는다”라고 규정해 놓았다. 17세기 중후반까지도 조선에서는 ‘자녀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윤행(輪行)’의 관행이 있었다. 예컨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문건(1494~1567년)의 일기를 보면 “1545년 정월 초5일이 어머니 기일이다. 제사 차례는 큰 누님 댁이다. ··· 제사를 거행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의성 김씨 청계종택 분재기(1671년)에도 “아버지 사후에 재산을 5남매가 균등하게 나눠 갖고 부모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기로 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처가살이도 빈번했다. 처가로부터 재산을 받았을 경우 처가 식구들을 돌보고 또 처가의 제사를 받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인물인 유희춘(1513~1577년)은 『미암일기』에서 “부모의 제사뿐 아니라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제사를 지냈다”라고 밝혔다. 처가살이의 또 한 예가 율곡 이이다. 이이가 태어나서 자란 강릉 오죽헌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딸만 다섯 둔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1476~1522년)가 죽자 재산 분배가 이뤄졌는데, 오죽헌은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 ‘묘소를 보살피라’는 명목으로 물려줬다. 그리고 둘째 딸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는 ‘조상 제사를 지내달라’는 당부와 함께 서울의 집 한 채와 전답을 받았다.
조선 후기 아들·장남 중심의 종법이 자리 잡았으나
장남 몰아주기 상속으로만 볼 수는 없어
그런데 17세기 후반인 1669년(현종 10년) 부안 김씨 가문 김명열의 유언장에 수상한 기류가 포착된다. “종가의 법(적장자 중심의 종법제도)이 무너진 지 오래다. ‘제사 돌려막기’가 관행으로 굳어졌다. 딸은 출가외인인데… 제사를 사위가 지내고….” 17세기 들어 예학이 발달하며 장남 위주의 유교 종법이 자리 잡았지만 ‘재산 균등분할’과 ‘제사 돌려 지내기’ 관행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명열은 타협책을 제시한다. 부모의 제사는 아들이 번갈아 가며 지내되 딸에게는 ‘결단코’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출가한 딸들에게는 아들 몫의 3분의 1만 분배하도록 했다.
18세기 말이 되면 제사는 장자가 혼자 받들고, 상속재산도 거의 독점하는 단계에 이른다. 부안 김씨 분재기 중 1779년(정조 3년) 김정열을 포함한 5남매가 합의하에 재산을 분배하고 남긴 문서가 대표적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맏아들인 김정열은 노비 74명과 논 15섬 5마지기, 밭 8섬은 물론 대나무밭, 밤나무밭 및 서당터까지 물려받았다. 반면 출가한 두 누이와 미혼인 두 동생은 10~15마지기씩 나눠 갖는 데 그쳤다. 지나친 몰아주기일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절대다수의 재산은 조상 제사와 동성마을(집성촌)의 형성 및 유지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따라서 장남이 임의로 처분할 수 없었다. 김정열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은 그를 포함한 5남매가 나눈 전답 중 장남 몫인 12마지기뿐이었다.
실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의 삼년상을 지낸 뒤에야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효령대군(1396~1486년)의 세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관에 안치하자마자 서둘러 재산 분배를 마쳤다. 그러자 조카 5명이 불만을 터뜨려 삼촌들을 고소하면서 왕실의 민낯이 드러났다. 성종은 관련자들을 문책했는데, 그 죄목은 무시무시한 강상죄였다(『성종실록』 1486년 11월 8일).
새삼 전통적인 재산 분배의 정신을 돌아본다. 유산은 살아서는 부모를 잘 공양하고 죽어서는 제사를 잘 지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모가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그저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의 재산은 당연히 내 것이라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누구든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기 전에 부모의 심중을 헤아려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