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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시작된 실험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2025년 07월호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의 노동시간을 기록하며 과로로 인한 산업재해, 정신건강 악화, 삶의 질 저하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지적된다. 그럼에도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최근 대선에서 주4일제 또는 주4.5일제를 공약으로 내세워 관심이 급증했지만, 한편에서는 시기상조라거나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가운데 유럽 국가들의 주4일제 실험과 도입 사례는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유럽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전부터 비대면 근무와 유연한 노동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이에 따라 주4일제 실험이 본격화됐다. 아이슬란드는 2015~2019년 노동시간을 주35~36시간으로 단축하는 대규모 실험을 통해 생산성 저하 없이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스웨덴 또한 하루 6시간 근무 실험으로 질병휴가 감소와 직원 만족도 상승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특히 주목할 국가는 영국이다. 2022년 6개월간 61개 기업이 참여한 주4일제 실험에서 92%의 기업이 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후 200여 개 기업이 주4일제를 정식으로 도입했다. 공공 부문에서도 사우스 케임브리지셔 의회가 주4일제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며, 런던 지하철 기관사들은 최근 단체협상 과정에서 주4일제를 주요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바 있다.
 

주4일제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반형 주4일제는 이른바 ‘100:80:100’ 모델로, 기존 급여를 100% 유지하면서 노동시간은 80%로 줄이고 100%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방식을 뜻한다. 반면 최근 영국, 벨기에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압축형 주4일제는 총노동시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루 근무시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예컨대 기존의 주5일 8시간 근무를 주4일 10시간 근무로 조정하는 형태다. 

일반형 주4일제는 노동자의 생산성, 만족도, 건강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나, 정량적 생산이 요구되는 산업에는 도입하기 까다로울 수 있다. 반면 압축형 주4일제는 출퇴근 횟수 감소와 육아참여 확대 등 다양한 장점이 있으나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피로 누적, 사고 위험 증가, 근골격계 질환, 정신적 스트레스, 수면 질 저하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크다. 실제로 여러 연구가 이러한 건강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기존의 실험을 바탕으로 주4일제를 지지하는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들은 산업재해 감소, 노동자의 정신건강 증진, 일·생활 균형 강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 탄소 배출 감축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 반대 측은 임금 감소, 생산성 저하, 플랫폼·비정규직 노동자의 소득 감소, 사업장 간 양극화 심화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주4일제를 당장 전면 제도화하기보다는 점진적 실험과 시범 운영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사례에서 보듯 주4일제 도입은 단순히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와 실행 방식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는 복합적 이슈다. 산업별·직종별 노동강도, 고용형태, 임금구조, 노동자의 생활양식 등을 세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정책 도입에 앞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실증 기반의 정책 설계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유럽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한국에 적합한 ‘한국형 주4일제’를 실험해 볼 때다. 이는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는 목적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삶을 지향하고 어떤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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