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으로 분절된 공급망 질서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위기지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반도체 분야 등에서 핵심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의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향후 우리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의 석유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펴는 등 무력 개입을 감행했다. 이후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친미 과도 정권을 수립하고 석유 인프라 재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재건을 통해 원유 공급을 확대하고 국제 유가 안정화와 미국 내 에너지 가격 및 물가 안정화를 기대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미국 중심의 에너지 공급망 재편 및 에너지 패권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확보함으로써 중국으로의 불투명한 에너지 자금 유입을 차단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베네수엘라·그린란드 자원에 대한 미국의 욕심,
에너지·자원 패권 강화해 AI 주도권 확보하고 물가 안정 꾀하려는 것
한편 미국은 그린란드를 무력으로 강제 병합하는 구상안을 발표해 EU와의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덴마크의 자치령이며 서반구에 위치한 그린란드는 희토류 등 전략적 광물을 중국 다음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핵심광물 공급망을 대체할 전략적 거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급부상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수에즈 운하 항로를 대체·보완할 수 있는 북극항로를 개척하는 데 있어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국 본토를 겨냥하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군사적 방어기지로서 전략적 가치도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국가들에 대한 관세 부과 위협을 철회하고 무력 사용을 배제한다는 공언으로 해당 지역의 긴장은 소강상태지만, 미국은 여전히 그린란드와 북극 지역 관련 합의를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미국이 베네수엘라·그린란드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에너지와 광물자원을 둘러싼 상업적 경쟁을 넘어선, 과거와는 다른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관세 등 제재 조치뿐 아니라 군사력을 활용한 ‘자원전쟁’의 단계로까지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미국이 에너지 및 자원에 대한 ‘자립’을 넘어 ‘패권 강화’를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AI 분야에서의 주도권 강화 등 미중 간 첨단기술 패권 경쟁도 자리잡고 있다. 특히 AI 모델의 발전으로 이를 구동하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미국은 AI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은 미국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한편, 국제 에너지시장의 가격 안정성을 유지하도록 해 자국 내 에너지 가격과 물가를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그린란드의 광물자원은 AI 반도체 및 하드웨어, AI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차세대 무기 등의 제조를 위한 필수 원자재로서 미국의 첨단기술 우위와 군사적 역량과도 직결된다.
지난 2월 초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주도로 핵심광물 공급망 강화를 위한 다자간 협력체인 ‘지전략적 자원협력 포럼(FORGE; Forum on Resource Geostrategic Engagement)’을 출범시키며 중국에 대한 희토류 의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FORGE는 기존의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을 대체하며, 중국의 가격 공세로부터 글로벌 자원시장을 보호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 간의 독자적인 ‘핵심광물 무역블록’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핵심광물에 대한 단계별 기준 가격을 설정하는 ‘가격하한제’를 도입해 중국산 저가 광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서방국 광산 기업들의 수익성을 보장하고자 했다. 또한 우방국 간 관세 혜택 등을 통해 광물을 원활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광물 전용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하기로 했다. 한국, 일본, EU 등 50여 개국이 참여하는 ‘자원동맹’을 구축해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 등 자원 무기화 효과를 반감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배제한 독자적인 자원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공급망 분절화 또는 블록화 추세는 선택이 아닌 상수…
한국, 올 6월까지 미국 주도의 자원동맹 ‘FORGE’ 의장국 맡아
이처럼 오늘날의 공급망 분절화 또는 블록화 추세는 선택이 아닌 상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중국을 배제하는 것을 넘어 공급망의 효율성(경제적 비용)보다는 회복력(안보)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무역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서방국들은 중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디커플링(de-coupling)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핵심 분야에서는 위험을 관리하는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에 집중하는 등 대응 노력을 공고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서방국들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동맹을 구축해 중국으로의 첨단기술 유출을 차단하고 중국의 강압적 조치에 공동 대응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분절된 공급망 질서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한국과 같이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위기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기업들에는 공급망 분절화가 생산 시설의 이전 및 자원 확보를 위한 비용 증가, 공급망 이중 구축으로 나타나는 비효율적 운영 등 위기 요인이다. 그러나 서방국들은 반도체 분야 등에서 핵심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현재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의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2023년 당시 산업통상자원부는 2030년까지 중국 등 특정국에 대한 수입의존도를 50%까지 낮춘다는 ‘3050 전략’을 발표했는데,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내 비축 확대 및 재활용 기술 개발뿐 아니라 중국을 대체할 생산(정제 및 가공) 기지를 개발해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방국들과 자원 공급망 동맹을 구축하는 데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그 일환으로 한국 정부는 올 6월까지 앞서 언급된 FORGE의 의장국 역할을 맡으며, 회원국 및 우리 기업들이 제조 경쟁력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중국 의존도를 낮출 수 있도록 실용적인 규칙 마련을 주도하는 ‘룰 메이커(rule-maker)’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기술 경쟁력’이라는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레버리지로 활용한다면 급변하는 글로벌 무역 환경 속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킬 뿐 아니라 글로벌 규범 수립을 주도하는 ‘책임 있는 중견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