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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퇴직연금 운용수익률 8.6%가 말해주는 것
박신영 한국경제신문 뉴욕 특파원 2026년 05월호

미국에 ‘연금 백만장자’가 많다는 사실은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은 미국의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인 401k의 이름을 따 ‘401k 밀리어네어’라고 불린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피델리티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401k 계좌에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사람은 65만4천 명으로 사상 최대였다.

물론 대부분의 평범한 미국 직장인들은 연금 백만장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한국 직장인보다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401k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은 20년간(2001~2020년) 연평균 8.6%였다. 최근 10년간 미국 401k 운용수익률은 약 8% 수준인 반면 한국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은 2.3%다.

미국 직장인이나 한국 직장인이나 바쁜 일상 때문에 퇴직연금 운용에 관심을 두기 힘들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수익률 차이가 나는 가장 큰 이유로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강력한 설계가 꼽힌다. 2006년부터 미국에 도입된 이 제도는 가입자가 별도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자산이 알아서 불어나는 구조로 설계됐다.

미국의 디폴트옵션이 고수익을 내는 핵심은 주식 비중을 높이되 리스크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다. 미국 노동부는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예금 같은 안전자산이 아닌, 주식 비중이 높은 실적배당형 상품(QDIA)을 권고한다. “주식 비중이 높으면 손실 위험이 크지 않느냐”라는 우려에 대해 미국은 TDF(Target Date Fund)의 ‘글라이드 패스(Glide Path)’ 전략으로 답한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서서히 고도를 낮추듯 은퇴 시점이 멀었을 때는 주식 비중을 90%까지 높여 공격적으로 자산을 불리고, 은퇴가 임박할수록 채권과 현금 비중을 자동으로 높여 수익을 확정 짓는 방식이다.

또한 ‘장기 분산 투자’를 통해 단기 변동성 리스크를 상쇄한다. 매달 일정 금액이 자동으로 유입되는 401k 특성상 시장이 하락할 때는 더 많은 수량의 주식을 저가 매수(코스트 에버리징 효과)해 결과적으로 원금 손실 구간을 빠르게 탈출하고 장기 우상향의 복리 혜택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 정부는 기업에 면책 특권을 부여해 단기적 시장 변동으로 인한 손실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적극적인 운용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줬다.

반면 한국은 2023년 7월 디폴트옵션을 도입했음에도 수익률이 저조하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수익률은 3.7%에 불과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디폴트옵션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강제성이 없고 예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어서다.

한국은 사측이 상품을 정해주는 게 아니라 근로자가 직접 골라야 한다. 이는 기업의 면책 조항이 부재한 탓에 나온 고육지책으로, ‘선택을 최소화한다’는 디폴트옵션의 기본 원리에 반한다. 결국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85.4%가 수익률이 낮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렀다. 펀드 등에 투자하는 적극투자형 상품은 14.9%라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음에도 ‘원금 손실이 두렵다’는 막연한 공포와 제도의 경직성 때문에 대부분의 자산이 저수익 늪에 빠져 있다.

한국 퇴직연금이 제 역할을 하려면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 근로자의 선택지를 단순화하고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에서 제외해야 한다. 대신 TDF처럼 생애주기에 맞춰 리스크를 자동 관리해 주는 상품으로 자금이 흐르게 유도해 한국에서도 ‘연금 백만장자’가 나올 수 있도록 구조적 변화를 꾀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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