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부산이다. 1876년 부산항의 개항으로부터 근현대가 시작됐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부산과 부산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개항과 부산, 그 15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전의 부산(동래)은 전통적인 왕조 체제에서 행정적·군사적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부산을 통해 처음으로 근대를 경험하며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됐다. 부산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입구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만나는 출구가 됐다.
개항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조선이 나서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것이 아니어서다. 그럼에도 조선은 중국을 통해 시대 전환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수호조규 체결 당시 개항장의 관문 및 경계 설치를 제시했다. 나름 국익에 기반한 주체적인 관점에서 개항에 임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힘과 그 체제의 침략적 이면(제국주의)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에서의 개항은 점차 한국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이 개항장이 되면서 일본 조계가 설정되자 일본은 이를 교두보 삼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부산은 일본의 침략 교두보로 재편되는 한편, 부산의 한국인들은 점점 외곽으로 내쳐졌고 일본인들은 자국민을 위한 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일본은 자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근대 도시 부산을 만들기 위해 도시 공간을 새롭게 재편했다. 부두의 조성,철도·전차의 부설 그리고 도시 시가지의 확장이 착착 진행됐다. 이 시기 진행된 도시화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적·계급적 차이가 반영돼 차별적이고 위계적이었다. 또한 일제의 대륙 침략에 따라 부산항은 무역항에서 병참수송 및 병참기지로 활용되며 군사 요새화됐다.
해방과 더불어 부산항은 대단위 인구 이동의 중심지가 됐다. 먼저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주둔·거주하던 120만 명 이상의 일본 군인과 민간인들이 부산항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반면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 태평양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거나 징병·징용을 갔던 한국인 약 140만 명은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떠난 지 오래돼 돌아갈 고향이 없거나 생계유지가 어려운 ‘귀환 동포’들은 부산에 남아 정착했다. 해방과 더불어 부산은 귀환 동포 20만여 명 이상을 포용한 도시로 전환됐다.
여기에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부산을 ‘피란 수도’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부산은 1953년 8월 15일까지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전쟁에 의한 국가 위기 극복과 전쟁 이후 국가 재건의 중심지였다. 또 항만과 철도 그리고 공항을 잇는 교통망을 중심으로 미군과 유엔군의 유일무이한 병참기지로서도 기능했다.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구호와 원조를 통한 대한민국 재건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시기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해 왔다.
이처럼 부산과 부산항은 한국전쟁의 유일한 안전지대이자 대한민국 구호와 재건의 시작이며 중심이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 원조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의 위기 극복과 전후 복구가 부산, 그리고 부산항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이러한 재건과 성장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부산항은 컨테이너 물동량 세계 7위, 세계 2위의 환적항이 됐다. 개항 150주년을 맞이한 올해 부산항 개항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