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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항로가 키운 싱가포르항, 북극항로가 키울 부산항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선장 2026년 08월호
15세기 말 유럽인들은 향신료와 비단 등 아시아의 상품을 직접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 나섰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다.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개척되면서 세계 해상교역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고, 항구의 흥망과 국가의 부 또한 새롭게 재편됐다. 새로운 바닷길은 언제나 새로운 항만을 성장시켰다. 이후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는 더욱 짧고 효율적으로 바뀌었고, 그 중심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항만이 싱가포르였다.
수에즈 항로 시대에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관문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선박들이 반드시 거치는 세계적인 기항지로 성장했다. 선박들은 이곳에서 연료를 공급받고 선용품을 조달하며 승무원을 교대하고, 선박 수리와 금융, 보험, 법률서비스까지 이용했다. 항만을 중심으로 다양한 해양서비스산업이 발전하면서 싱가포르는 세계적인 해운 허브로 자리 잡았다. 항만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항만의 경쟁력은 단순히 물동량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박이 기항하면서 창출하는 연료 공급, 선박 관리, 수리, 해양금융, 해상보험, 해사법률서비스 등 해양서비스산업의 부가가치가 항만의 진정한 경쟁력을 좌우한다. 북극항로 시대 부산항의 새로운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해상 경로인 북극항로는 이러한 해상교역의 흐름을 다시 한번 바꿀 가능성을 갖고 있다. 북극해를 통과하면 아시아와 유럽 간 운항거리가 기존 수에즈 항로보다 크게 단축된다. 항해시간과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 잠재력도 매우 크다. 아직은 계절적 제약과 쇄빙선 지원, 항행 안전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만, 기후변화와 선박기술의 발전으로 북극항로의 활용 가능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필자도 선장 시절 유럽 항로를 운항하면서 마지막 기항지에서 연료를 보급하고 선용품을 공급받으며 승무원을 교대하는 과정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항만은 단순히 선박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북극항로 시대에는 이러한 경제적 기능이 부산항으로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북극항로가 본격 활성화된다면 부산항의 전략적 가치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부산은 북극으로 향하는 전략적 거점항이자 동북아 최대 환적항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싱가포르가 수에즈 항로에서 누려왔던 기항지의 경제적 가치 가운데 상당 부분을 부산이 확보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선박의 벙커링, 선용품 공급, 선박 관리, 수리, 해양금융, 해상보험, 해사법률서비스 등 고부가가치 해양서비스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기회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부산항은 동북아 최대 환적항으로서 축적된 물류 기반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산업은 쇄빙선과 내빙선 건조를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해운·항만 운영 경험과 우수한 해기사 및 해양 전문인력은 북극항로 시대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북극항로 개척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을 마련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법 시행을 통해 부산항을 북극항로의 전략 거점으로 육성하고, 이에 더해 해양서비스산업과 국제협력, 안전운항 체계를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바닷길은 언제나 새로운 항만의 시대를 열었다. 희망봉 항로는 대서양 시대를 열었고, 수에즈 운하는 싱가포르를 성장시켰다. 북극항로 역시 부산항의 경제적 가치와 전략적 위상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북극항로의 미래는 곧 부산항의 새로운 가치이며, 대한민국 해양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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