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감>이 떠올랐다. 경북 영주시 죽계천을 끼고 걷는 소백산자락길을 반나절 거닐고 난 후였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지인(유지태 분)이 1979년에 사는 소은(김하늘 분)과 우연히 무선통신으로 대화를 나눈 것처럼, 2014년의 기자는 죽계구곡(竹溪九曲)의 한가로운 아름다움 앞에서 500년 전 옛 선비들과 교감했다.
소백산 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소백산자락길은 모두 열두 자락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가 찾은 첫 자락은 소수서원, 선비촌 등 선비문화를 느낄 수 있는 선비길, 죽계구곡을 감상하며 걷는 구곡길, 잣나무 숲과 산촌마을을 볼 수 있는 달밭길로 이어진다. 총거리 12.6km.
시원한 계곡에 빨리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에 구곡길이 시작되는 배점분교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배점분교 옆으로는 겨울철새인 원앙이 많이 찾는다는 배점호수가 잔잔하게 보였고, 좀 더 올라가니 죽계천의 모습이 나타났다. 죽계천은 고려시대의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자 퇴계 이황, 주세붕, 신필하 등 유현(儒賢)들이 명명한 죽계구곡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산수가 아름다운 아홉 굽이에 이름을 붙이고 구곡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죽계구곡은 그 같은 구곡문화의 현장이다. 구곡길은 푸른 나무들로 빼곡한 숲과 예부터 수없이 이곳을 지나쳤을 사람들의 발길로 고와진 흙길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기대감을 안고 죽계구곡 하류에서 시작되는 9곡부터 1곡까지 발길을 옮겼다. 사과농사가 주업인 지역이라 그런지 9곡 근처에는 사과밭이 가득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가다 계곡으로 내려갔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굽이굽이 자연의 순리대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는 더운 여름날의 피로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2곡 부근에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짓고 지냈다는 초암사도 있었다.
초암사를 좌측으로 끼고 돌아가니 소백산의 숨은 비경, 달밭길에 접어들었다. ‘달’은 원래 산의 고어다. 그러니까 달밭은 산의 경사진 면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밭들을 의미한다. 달밭길은 길을 따라 나무들이 아치형 터널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이 펼쳐지기도 했다. 배용호 소백산자락길 위원장은 소백산이 한라산 다음으로 식물분포가 다양한 산이라고 설명했다. “소백산은 냉대와 온대의 구분 산맥인데다 남쪽엔 화강암 지질, 북쪽엔 석회암 지질이라 경관도 다르고 삶의 모습도 다릅니다. 그래서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생태자원도 풍부한 거죠.”
소백산자락길의 매력에 취해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시원하고 담백한 육수가 일품인 메밀묵밥으로 속을 채우고 이번에는 첫 자락의 시작점인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학문을 강론하던 강학당은 겹처마에 팔각지붕으로 엄숙하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학구재와 지락재는 교수의 숙소인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스승을 높이는 유교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라고 배 위원장은 말했다. 소수서원과 맞닿아 있는 선비촌에서는 전통한옥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소백산자락길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받았다. 그만큼 각 자락마다 다양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올여름, 소백산 자락에서 옛 선비들의 감흥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맑은 계곡 물속을 첨벙거리는 소박한 선비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