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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너머 소망을 향한 여행
이종범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14년 08월호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처지라 역사탐방에 자주 초대받는다. 한참 전 전북 부안을 돌았을 때였다. 정유재란 때 고장을 지키고자 일어섰다가 주검마저 거두지 못한 선비를 기리는 비석의 문구는 뭉클했다. “당신이 있어 오늘 우리가 있다.” 그래도 탐방단은 아전의 딸로 태어난 부안 명기 이매창(1573∼1610년)이 한때의 정인을 떠나보내고 읊었다는 시조를 웅얼대며 오붓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고창군 성송면 어느 마을, 한 비석의 사연은 아련했다. 주인공은 한말 어지러운 세상 실국광민(失國狂民)을 자처하다가 면암 최익현이 1906년 늦봄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선포하자 따랐다가 순창에서 순절한 정시해(鄭時海). 그때 일행 중의 독백, “이 비석으로 들판이 문득 훤하다.” 망국의 세월,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한 유생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빛을 읽었던 태연한 언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의 탐방은 정녕 빛을 찾아가는 관광(觀光, Light-seeing)이었다.


관광은 ‘주역’의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나왔다. 옛적 나라의 빛은 임금의 왕궁, 왕경의 번화함이었던지라 벼슬하려고 과거보러 가면 관광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빛, 나라의 빛은 우리의 삶과 놀이, 말과 노래, 일터와 쉼터, 생태와 자연에 있다. 정시해와 같은 순국선열의 희생조차 빛이다.


그런데 오늘날 관광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보기(Sight-seeing)에 그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더구나 자아와 풍경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더욱 아쉽다. 최근 역사교훈여행으로 번역되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즉 ‘재난 현장이나 역사적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은 하나의 대안이 아닌가 싶다. 유대인 대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수용소, 수백만명이 학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9.11 테러의 그라운드 제로 등이 유명한데 전쟁과 학살에 대한 성찰, 화해와 치유를 희망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대문형무소가 돋보이지만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전마무리주 인근 ‘아름다운 순례길’ 그리고 광주 ‘오월길’ 등도 시대의 아픔을 보듬고 미래의 소망을 담고 있다. 이 같은 현장은 도처에 있다. 20세기 우리 겨레가 자주독립운동 나아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준 희생과 성취만큼이나 앙금과 상흔 또한 어둠에 가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장은 당대에 그치지 않는다. 장구한 중화문명체제에서 고유문명을 지켜내고 발전시킨 우리 겨레의 흔적 또한 겨레의 빛을 뿜어내는 현장이다. 바로 사찰과 서원, 누정과 정려, 비석과 무덤, 그리고 크고 작은 박물관일진대 이러한 장소를 찾아가며 시간의 무게가 비추는 빛을 만난다면 현실의 좌절과 상흔마저 치유 너머 소망으로 환생하지 않을까. 오가는 피서지 주위에서 찾아가거나 요즘 주목받는 농촌체험여행이나 자원봉사여행의 틈새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제 여행도 풍경 너머 보이지 않는 저편을 꼼꼼히 살펴가며 ‘함께’ 하는 겨레의 빛을 찾아갈 때가 됐다. 서로의 응어리, 아쉬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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