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회항’ 사건으로 대한민국 재벌기업의 수치스런 민낯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 지난 연말 열풍을 일으킨 TV드라마 <미생>은 갑을문화, 군대문화가 여전한 우리 조직문화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무엇이 문제일까? 바꿀 수는 없는 걸까? 벤처 불모지였던 한국에 기술과 열정만으로 벤처신화를 쓴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을 만나 왜 지금 땅콩회항 같은 사건이 일어났는지, 우리 기업의 문제는 무엇인지, 해결책은 없는지 물어봤다.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출발한 비행기를 돌리는 상상도 못할 일이 오너 3세에 의해 벌어졌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보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왕자를 저격해 1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일어날 때가 됐으니까 그런 일이 생겼다.’라고 말한다. 땅콩회항 사건도 그 사건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이제는 갑을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조직 내 갑을문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과거의 성공방정식이었으니까. 우리 옛날 성공은 열심히 앞으로 뛰자는 거였다. 신속하게 앞으로 달리기 위해선 앞에서 뛰면 같이 뛰어줘야 한다. 열심히 뛰자는데 안 뛰는 사람 있으면 두들겨 패줘야 될 거 아닌가. 그것으로 삼성이 컸고 현대가 큰 거고. 갑을문화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단지 이제는 알을 깨고 나올 때가 된 거다.
아직 우리 기업들은 깨고 나올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억지로 깨고 나오게 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깨고 나오는 거다. 기업들이 ‘내가 이대로 가면 죽겠다.’ 이래야지 깨진다. ‘너 깨야 한일어났는다.’고 하는 당위성만 갖고는 안 된다.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직급을 없앤 기업이 있는 반면 다시 부활하는 기업도 있던데…. 반복되는 효율을 중시하는 조직은 직급이 있는 것이 좋다. 어제 한 일 오늘도 하고 내일 또 하고 계속 똑같은 일을 할 때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더 잘할 거 아닌가. 따라서 그런 조직은 직급이 사라지기 어렵다. 반면 혁신이 필요한 조직은 직급이 혁신을 저해한다. 이런 기업은 경쟁력을 가지려면 수평조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글로벌화된 기업은 수평으로 가게 돼 있다. 혁신 안 하면 기업이 죽으니까.
사실 근본적으로는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가 핵심 아닌가. 지배구조는 우리 기업의 가장 큰 문제다. 예전엔 기업의 주인을 주주라고 했다. 지금은 주주라는 이론이 자꾸 줄고 있다. 소비자와 주주와 임직원, 이 셋을 기업의 주인으로 본다. 물론 아직까지는 기업의 주인이 주주라는 데 중심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그렇다고 주주자본주의도 아니다. 우리 기업 오너일가들은 갖고 있는 지분이 크지 않은데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정말 황당한 것은 대기업 계열사의 사장 인사다. 사장 인사는 논리적으로 그 회사 이사회가 하는 거다. 이사회는 주주총회에서 뽑는 거고. 주총도 안하고 이사회도 하기 전에 이번에 누가 사장으로 승진했다고 발표를 한다. 이것은 법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는 제왕적 오너제도다. 오너일가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 기업의 이익이 서로 일치할 때는 문제가 없다. 개발시대에는 이 셋이 일치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치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가 기업 이익과 오너 이익이 다른 경우인데 한국은 이런 예가 많다. 이것이 바로 지배구조의 문제다. 제왕적 오너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주총이 문제다. 섀도보팅(shadow voting; 의결권 대리행사제도)부터 시작해서 지금 대부분 주총이 허수아비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회도 그렇고. 올해 전자투표제(주주가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 의결권 등을 행사하는 온라인 투표방식)가 확대되면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더 보완해야 할 점은 없을까. 독일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은 노사협의체가 잘 돼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뤄 노조가 경영에 참여한다. 동시에 노조는 무리한 요구를 안 한다. 한국도 궁극적으론 독일처럼 가야 한다. 지금은 주주만 경영을 한다 생각하는데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주주와 임직원이 같이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적자 보는데도 월급 올려달라고 파업하는 일이나 회사가 이익이 많이 났는데도 저 혼자 갖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도 어려운 모델이다. 독일식의 상호신뢰에 바탕을 둔 합의모델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지 알면서도 당장 이익이 생기니까 자꾸 신뢰가 깨진다.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장기적으로 제일 중요한 과제다. 당장은 주주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주주자본주의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첫걸음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독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독일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와 사가 각기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니까 서로 손해를 보더라는 것을 배웠다. 한국도 그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좋은 모델을 몇 개 만들어야 한다. 경영은 가치창출과 분배과정이다. 경영 참여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같이 보자는 거다. 가치창출을 극대화하는 데 임직원들이 참여해야 한다. 무엇보다 회사가 많이 벌면 우리도 많이 가져가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못 가져간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벤처기업들 중에는 노조는 없지만 가치창출과 분배를 선순환하는 기업들이 많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결국 혁신이 문제다. 지금은 ‘와해적 혁신’이 필요한 때다. 한국은 오퍼레이션 효율, 즉 생산성을 통해 제1차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생산성이 뭐냐, 열심히 일하자다. 그것 갖고 열심히 따라잡아서 2만달러 국가까지 올랐는데 더 이상 앞으로는 못 나간다. 그러면 혁신을 해야 하는데 점진적 혁신은 중국이 또 따라왔다. 그래서 와해적 혁신을 키워야 한다. 점진적 혁신은 6시그마, MOT(기술경영) 등 방법론이 있었지만 와해적 혁신은 룰이 없다. 결국 기업가정신이 좌우하게 된다. 기업가정신은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을 키우려면 혁신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실패는 무조건 나쁜 거였다. 그래 갖고는 사람들이 혁신에 도전하지 않는다. 실패를 지원해줘야 한다. 창업자 연대보증 면제, M&A 회수시장 이 두 가지가 혁신의 안전망이다.
재벌 2, 3세들이 성공하기 쉬운 사업에 주로 진출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혁신의 안전망이 모자라서다. 오너 2세가 새로운 사업을 벌여 실패하면 당장 능력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으려면 있는 것 갖고 조그만 애들 두들겨 패서 뺏어오는 게 쉽지 않나. 갑을관계를 통해 납품업체를 쥐어짜고 불공정 거래하고 정치적 타협을 통해 내 영역을 확보하는 쪽으로 가는 거다. 실패를 지원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전한 길로 가고 안전한 길로 가게 되면 정치적 투쟁은 일어나게 돼 있다.
말씀을 들으니 혁신의 안전망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우리 경제의 제1차 화두는 혁신의 안전망이다. 혁신의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혁신하라고 하면 혁신하는 척만 한다. 혁신해서 실패하면 나한테 불이익이 오니까 실패 안 할 일을 한다. 실패 안 할 일에 도전하는 것은 도전이 아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을 하는 게 도전이다. 그래야 혁신이 일어나는 거고.
벤처1세대로서 그때는 창업하기에 더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도도 없었고 코스닥도 없었고. 하나 있었던 게 무식한 게 있었다(웃음). 무식한 것은 뭐냐면 벤처기업 하다 망하면 신용불량자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다 안다. 그러니까 안 하는 거다. 우리가 줄 타고 넘어가는데 중간에 발판도 만들고 색칠도 해주고 옛날보다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줄은 줄일 뿐이다. 줄이 끊어졌을 때 받쳐줄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이제는 시장기회 포착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우리 기업들은 남들을 쫓아가는 경영이 아니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는 경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사내에 혁신을 이끌 사내기업가들을 키워야 한다. 사내기업가는 사내 혁신의 동력인 동시에 벤처창업의 원천이 되기에 기업 차원에서도 국가 차원에서도 반드시 육성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