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전 우리는 어느 마을이나 공동우물을 지니고 있었고 그곳에는 정감 있는 삶과 평등한 공유가 있었다. 극심한 가뭄에도 고갈되지 않는 맑은 음용수를 지니고 있던 나라, 그것이 우리 과거 모습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근대화의 바람에 우물 문화는 사라졌고, 이제 농어촌 대부분 가정이 상수도 혜택을 받아 부족함 없이 음용수를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물은 풍족한 것인가?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유엔과 OECD는 우리나라를 물부족, 물스트레스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지구 차원에서 볼 때 맑은 음용수 확보 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가중되고 있다. 월드워치연구소는 “물 희소성은 우리 시대 지구 환경에 있어 가장 피하고 싶은 도전”이라 언급한 바 있다. 또 다른 당면 문제는 물사용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현상의 심화다. 선진북미의 경우 1인당 하루 물사용량은 600ℓ에 이르는 데 반해 빈곤국 아프리카는 6ℓ에 불과하다. 또한 선진국 신생아 물사용량은 빈곤국 신생아 사용량의 50~70배에 이른다. 결국 물평등권의 심각한 격차를 해결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고 물부족으로 고통받는 약 14억 인구에게 보편적 물공급이라는 의무가 인류에게 대두되고 있다. 지구의 물의 양은 일정한데 그 많던 물이 대체 어디로 사라져 부족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산업화에 따른 지표수 오염과 가상수를 통한 물교역 증가가 그 원인이다. 지난 50년간 인류는 엄청난 속도로 지표수를 오염시켰고 제3세계의 경우 오폐수 중 90%는 미처리돼 강과 연안으로 방류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강 중 80%는 오염이 심화돼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여성들이 깨끗한 물을 찾아 먼 거리를 헤맨다. 이 나라 여성들이 하루 동안 물을 길러 다니는 거리를 합하면 지구에서 달까지 무려 16번을 왕복할 수 있는 거리와 맞먹는다. 1990년대 초 이스라엘 경제학자들이 자국의 부족한 물이 교역을 통해 유출되고 있고 이것이 경제관점에서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무역과정에서 포함되는 ‘가상수(Virtual Water)’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가상수란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의 총량을 말한다. 이 개념을 무역과 결부시켜 설명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적인 물의 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즉 쌀 1kg을 생산하는 데 약 2,497ℓ의 물이 필요한데 외국에서 쌀 1kg을 수입하면 물 2,497ℓ가 가상적으로 유입된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데도 물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이러한 가상수 수입 때문이다.
최근 들어 실제 사용되는 물의 양과 가상수의 양을 합해 개인이 소비하는 물의 총량을 의미하는 ‘물발자국(Water Footprint)’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최초 생산부터 최종 소비까지 전 과정에서 소비되는 전체 물의 양을 말한다. 탄소 및 생태발자국과 함께 3대 개념으로 부상하고 있는 물발자국 개념을 적용하면 보다 실질적인 물사용량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쇠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총 1만5,415ℓ의 물이 소비되는데 이를 쇠고기의 총체적인 물발자국이라 한다. 돼지고기는 1kg당 5,988ℓ, 커피는 1ℓ당 1,056ℓ의 물발자국을 남긴다.
유럽에 수출되는 장미는 케냐 나이바샤호의 수자원을 고갈시키고 베트남은 커피 수출을 위해 대수층을 파괴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빈곤국이 물부족으로 고통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스리랑카,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4위의 가상수 수입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가상적인 물교역으로 발생되는 전 지구적 물부족 현상을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을 처지가 못 된다. 또한 수출주도형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어 유출되는 가상수 관리도 중요 과제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공동의 ‘우물’과 같은 공공재로서의 물에 대한 기본적 접근권을 보장하고 국가 간 호혜적인 물이용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