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1일부터 21일까지 2주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에선 ‘리스본협정 개정을 위한 외교회의’가 개최됐다. 개최 방식에 대한 논란을 안고 개최된 이번 회의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국, 일본, 호주 등 상당수 WIPO 회원국은 지리적 표시에 대한 국제규범 제정은 모든 국가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문제이므로 리스본협정 가입국(리스본 동맹국)만이 아닌 모든 회원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한 리스본 동맹국과 유럽연합(EU)은 지리적 표시가 기존 리스본협정의 원산지명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신들만의 논리를 앞세워 결국 ‘원산지명칭 및 지리적 표시에 관한 리스본협정 제네바조약(Geneva Act of the Lisbon Agreement on Appellations of Origin and Geographical Indications)’을 채택했다. 조약의 채택과정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제 국제규범으로 성립된 것이라 볼 수 있어 조약의 채택경과와 주요 내용, 향후 동향 및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에서도 지리적 표시 보호 문제는 프랑스, 이탈리아 중심의 구대륙 국가와 미국, 호주 중심의 신대륙 국가 간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던 난제 중의 하나였다.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협정(TRIPS;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상의 지리적 표시 관련 규정(partⅡ, section 3)이 이들 양 진영 간의 합의 결과였으나, 당시 EC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은 TRIPS상의 내용에 만족하지 못했고 이후 계속해 지리적 표시에 대한 보다 강한 보호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WTO TRIPS 이사회에서의 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대륙 국가들의 반대로 별다른 진전이 없자 구대륙 국가들은 WIPO로 무대를 옮겨 지리적 표시 보호제도에 대한 논의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리스본 동맹국들만의 표결권 행사로 채택된 제네바조약
1998년 3월 WIPO에서는 ‘상표법 등에 관한 상설위원회’가 신설돼 지리적 표시의 국제등록 및 보호에 관한 문제가 논의됐으나 역시 양 진영의 입장 차이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자 2008년 9월 리스본 동맹국은 ‘리스본시스템 개선 실무그룹’을 출범시켜 지리적 표시 보호를 위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리스본시스템 개선 실무그룹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총 10차례의 회의를 개최해 그 과정에서 지리적 표시의 국제등록 및 보호에 관한 내용을 리스본협정 개정안에 포함시켜 처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외교회의 개최 결정 당시인 2013년 9월까지도 리스본협정 개정 문안은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였고, 외교회의 참석범위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따라서 지리적 표시와 같은 모든 국가와 관련된 지식재산권을 다루는 조약을 논의하고 채택하는 외교회의라면 당연히 모든 WIPO 회원국들의 참여 아래 개최될 것으로 예상됐다. WIPO의 최근 25년간 외교회의에도 모든 WIPO 회원국이 참여해 왔다.
그러나 2014년 10월에 회람된 리스본협정 개정 외교회의 절차규정안은 28개 리스본 동맹국만이 정회원 자격으로 외교회의에 참석해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반적인 예상과 국제기구의 관행을 벗어난 외교회의 개최 방식에 대해 미국, 호주 등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2015년 5월 리스본 동맹국들은 자기들만의 표결권을 행사해 제네바조약을 채택했다.
높은 수준의 보호가 모든 상품의 지리적 표시에 부여
먼저 제네바조약에 따르면 지리적 표시도 리스본협정상의 원산지명칭과 동일한 내용으로 보호받게 된다(조약 제2조). 즉 보호 수준에서 양자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현행 리스본협정에 따른 원산지명칭은 지리적 표시와 구분돼 사용되고 있으며 보다 높은 수준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제네바조약에 따르면 용어에선 지리적 표시와 원산지명칭을 구분하고 있으나 보호내용에선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 결국 WTO TRIPS상 ‘포도주 및 주류’의 지리적 표시에 부여되는 높은 수준의 보호가 모든 상품의 지리적 표시에 부여되게 된 것이다. 즉 같은 종류의 상품인 경우는 물론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인 경우에도 지리적 표시 수혜자(beneficiaries)의 이익을 저해할 우려가 있거나,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지리적 표시의 명성을 저해 또는 희석화하거나, 부당한 이익을 얻기 위한 사용이 금지되며, 상품의 진정한 출처가 표기됐다 하더라도 이를 모방하는 수준에 이른 사용 또한 금지된다(제11조 1항). 그리고 상표 사용이 이와 같은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 체약국은 후순위 상표의 등록을 거절 또는 무효화하도록 하고 있다(제11조 3항). 또한 지리적 표시가 번역돼 사용되거나 ‘스타일’, ‘유형’, ‘양식’, ‘생산’, ‘모방’, ‘방법’, ‘생산된 것과 같이’, ‘처럼’, ‘유사한’ 등의 용어가 수반되는 경우에도 그 사용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제11조 2항), 등록된 지리적 표시는 체약국 내에서 일반명칭 또는 관용명칭화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있다(제12조).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보호가 모든 상품의 지리적 표시에 부여된다면 유럽의 특정 지명을 관용명칭 또는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미국, 호주 등 신대륙 국가들에는 상당한 법적 불안정성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제네바조약에서는 지리적 표시와 상표권 등 다른 권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뒀다. 즉 등록된 지리적 표시라 하더라도 선의로 등록 또는 사용된 선행상표의 권리를 저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제13조 1항). 또한 개인의 성명 또는 동식물의 명칭의 경우는 공중을 오인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이를 사용할 권리를 저해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제13조 2항, 3항). 그리고 선행상표, 기타 권리를 이유로 행해진 지리적 표시 보호 거절결정의 철회 또는 보호결정으로 인해 보호받게 된 지리적 표시는 원칙적으로 선행상표, 기타 권리를 저해하지 않는 것으로 함으로써 체약국들이 선행상표, 기타 권리와 지리적 표시의 보호에서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제13조 4항).
다음으로 특기할 내용은 지리적 표시의 등록과 관련해 개별수수료(individual fee) 제도가 도입된 점이다. 현행 리스본협정에서는 원산지명칭 등록 시 WIPO에 단일 수수료만을 납부하도록 하고 있는 데 반해, 제네바조약에 따르면 WIPO에 납부하는 국제등록료와 별도로 각 체약국은 자국법 체계에 따라 지리적 표시 국제등록 시 실체심사에 소요되는 비용 및 필요한 행정수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7조 4항).
별도 수수료의 징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지리적 표시의 특성에는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으나 등록·보호되는 지리적 표시가 많은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들 간에 보호받는 혜택과 보호를 해 줘야 하는 의무 간 형평성 보장 차원에서 개별수수료 제도가 주장된 것이다. 지리적 표시에 대해서도 상표와 동일하게 수혜자 부담 원칙 및 명확한 권리 관리의 확보를 위해 갱신등록료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내용은 조약의 가입 당사자를 국가뿐만 아니라 정부 간 기구에 대해서도 인정했다는 점이다. 정부간 기구와 그 소속 국가들 간의 권리관계가 다소 복잡해지게 될 가능성은 있으나, EU와 아프리카지재권연맹(OAPI)도 자체적인 지리적 표시 보호시스템을 갖춘다면 제네바조약의 당사자로서 자기 지역 내의 지리적 표시를 직접 등록하고 보호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제28조 1항).
EU, 제네바조약 근거로 광범위한 통상압력 가할 가능성 높아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의도한 바대로 지리적 표시에 대한 국제등록 및 보호에 관한 국제규범을 탄생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다. 5개 국가 또는 정부 간 기구의 서명·비준 또는 가입만 있으면 발효되므로 제네바조약상의 시스템 출범은 시간문제다. 다만 미국 등 여타 국가들의 심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분간 숨 고르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제네바조약이 지리적 표시 보호에 관한 통일적인 국제규범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 호주 등은 제네바조약의 채택으로 인해 자국 농축산물에 사용되던 지명의 계속 사용이 제한받게 돼 관련 산업의 위축 또는 혼란이 초래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지리적 표시 보호시스템이 향후 구대륙 국가 중심으로 정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제네바조약의 채택은 WTO TRIPS상의 지리적 표시 등록제도에 관한 협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문제이며, 제네바조약은 채택과정에서의 흠결로 인해 적법하지 않은 조약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제네바조약이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을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번 외교회의에서 우리나라는 회의 참석범위, 의사결정 방식 등 절차상의 문제점을 이유로 조약 채택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한-EU FTA에는 제네바조약과 유사한 내용의 보호 규정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 EU의 지리적 표시를 보호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EU는 제네바조약을 근거로 포도주 또는 농축산물 이외의 상품에 대한 지리적 표시의 보호를 추가로 요구하는 등 보다 광범위한 통상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내세울 만한 지리적 표시가 많지 않은 우리나라로서는 이들의 요구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이에 상응한 우리의 국익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