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10차 WTO 각료회의(MC-10)가 개최됐다. WTO 출범 20주년이 되는 해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열린 각료회의(12월 15~19일)는 WTO의 커다란 분기점이 됐다. 농산물 수출보조 철폐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의 지속 여부 등 합의하지 못한 사항들이 WTO와 다자통상체제의 미래에 중대한 과제를 남겼다.
지난해 12월 개최된 나이로비 각료회의를 위한 준비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2013년 제9차 발리 각료회의에서 2014년 12월까지 잔여 DDA 협상의제 타결을 위한 포스트 발리 작업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기초로 나이로비 각료회의에서 성과 도출을 모색하고자 했다. 작업계획 수립 시한을 2015년 7월까지로 연장했으나 농업 국내보조, 농산물과 비농산물 시장접근 등 DDA 협상 핵심의제에 대한 이견이 지속돼 작업계획 수립에 실패했고, 결국 나이로비 각료회의는 타협 가능성이 있는 농업 수출경쟁, 개발, 규범 협상 등 제한된 분야에서의 성과도출을 추진하게 됐다.
정보기술협정(ITA) 최종 타결…수산보조금 협상은 실패
회의에서는 DDA 협상과 관련해 수출보조 철폐를 포함한 수출경쟁 등 농업 분야 4개 각료결정(Ministerial Decision) 및 최빈개도국(LDCs)에 대한 특혜부여와 관련되는 2개 각료결정으로 구성된 소규모 패키지에 합의하는 제한된 성과를 거뒀다. 그 외 전자상거래 작업계획 등 WTO 정규 활동과 관련되는 3개의 각료결정을 채택하고, 아프가니스탄과 라이베리아의 가입을 승인했다. 또한 각료회의 기간 중 우리나라를 포함해 53개국이 참여한 정보기술협정(ITA) 확대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한편 DDA 협상의 지속 여부에 대해 나이로비 각료선언은 회원국 간 이견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이에 대해 사무총장이 정기적으로 일반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농업 협상에서는 수출경쟁 관련 2005년 홍콩 각료회의에서 약속한 수출보조 철폐 시한을 확정하고, 수출보조와 유사한 지원효과가 있는 수출신용, 수출국영무역기업, 식량원조 등에 대한 규율을 강화했다. 농산물 수출보조는 선진국은 즉시, 개도국은 2018년까지 철폐하고, 우리나라도 활용 중인 농업협정 9.4조에 따른 개도국 수출 마케팅 및 물류 보조는 2023년까지 철폐하기로 했다. 면화 부문에서는 최빈개도국에서 생산되는 면화 및 관련 상품에 대해 무관세 무쿼터 혜택을 제공하고, 면화에 대한 수출보조를 조기 철폐하기로 했다. 농산물 개도국 특별긴급관세(SSM) 도입 문제와 식량안보 목적의 공공비축 식량 구매로 인한 농업 국내보조 한도 초과를 다룬 문제에선 구체적 합의사항은 없었으나 각각의 각료결정 채택을 통해 관련 협상을 지속하기로 했다.
최빈개도국 분야에서는 특혜 원산지 결정 기준 단순화, 원산지 누적 확대, 서류요건 완화 등을 통해 최빈개도국들이 특혜 시장접근 기회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특혜 원산지 기준을 개선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로 했다.
나이로비 각료회의에서 성과도출을 모색했던 DDA 규범, 서비스 국내 규제 및 개도국 우대조항 협상에서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규범 협상의 수산보조금 분야에서는 수산보조금 규율 강화를 희망하는 피시프렌즈(Friends of Fish) 국가들과 ACP(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국가 등 대부분 회원국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특정 수산보조금 금지 및 투명성 강화 등과 관련한 규율 목표수준, 개도국 우대 등 쟁점사항에 대한 이견을 극복하지 못해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반덤핑 분야에서도 일부 개도국들의 반대 등으로 성과가 없었다.
이번에 타결된 정보기술협정(ITA) 확대협상에서 참가국들은 교역 규모가 총 1조3천억달러에 이르는 201개의 추가적인 정보기술품목에 대한 관세를 대부분 3년 이내, 민감품목의 경우 최장 7년에 걸쳐 철폐하기로 했다. 그 혜택은 모든 WTO 회원국에 돌아가게 된다. WTO 정례활동과 관련해서는 소규모경제 작업계획, 무역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에 대한 비위반 및 상황제소 적용 유예기간 연장, 전자상거래 작업계획 등 3개 각료결정이 채택됐다. 아울러 아프가니스탄과 라이베리아의 가입이 승인돼 이들 국가의 국내절차 등 후속절차가 완료되면 WTO 회원국은 164개로 늘어난다.
나이로비 각료회의 결과 WTO 협상과 관련한 중대한 변화가 생겼는데, 현재 방식대로의 포괄적 다자라운드로서의 DDA 협상은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DDA 협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과 실패한 방식의 협상을 더 이상 지속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 간 대립이 매우 커 DDA를 지속 또는 종료한다는 명시적 합의는 도출되기 어려웠다. 이를 감안해 나이로비에서는 합의를 추구하지 않기로 하고(agree to disagree) 결정을 미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DDA 협상은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DDA 협상 의제에 대한 논의가 모두 중단된다는 것은 아니다. DDA 협상 지속에 반대하는 회원국들도 DDA 틀 내에서 협상을 계속하는 데 반대하는 것이지, 모든 협상 의제의 논의 종료를 요구하지는 않고 있다. 나이로비 각료선언에서도 회원국들은 농업, 비농산물시장접근, 서비스, 개발, 지식재산권, 규범 등 잔여 DDA 협상의제를 진전시키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회원국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농업 국내보조, 시장접근, 농산물 특별긴급관세, 식량안보 공공비축, 수산보조금 규율 수립 등을 위한 협상 진전과 성과도출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 DDA 협상에서 해왔던 것처럼 협상의제의 포괄적 추진은 어려울 것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협상 방식에서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룬 DDA 협상 논의성과의 활용 여부와 개도국 우대 문제가 큰 쟁점이다. 제네바에서는 구조(structure, architecture)라는 용어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기존 DDA 구조를 그대로 활용할지 아니면 새로운 구조를 찾을지에 대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 지난 14년 동안 성공하지 못한 DDA 협상 방식을 지속하는 데 반대하고 기존 협상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주장의 핵심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신흥국들에는 다른 개도국들과 동일한 개도국 우대(special & differential treatment)를 부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반면 인도, 중국 등 신흥국들은 이 같은 개도국 세분화 시도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자국에 대한 개도국 신축성 보존을 위해 기존 DDA 협상 구조가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이로비 각료선언에서도 개도국 우대(S&D) 조항의 중요성은 재확인했으나 일부 회원국들은 새로운 구조(new architectures)를 찾기를 희망한다고 명시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개도국들도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선진국, 개도국, 최빈개도국이라는 카테고리에 따라 상이한 의무를 부과하는 기존 DDA 협상 구조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협상의제와 회원국 측면에서 다양한 형태의 협상 진행될 듯
제네바에서는 나이로비 각료회의 지침에 따라 협상 진전 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회원국 간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단기간에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WTO에는 이제 숙고의 시간(period of reflection)이 필요하며, 회원국들이 공감대를 찾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WTO 협상은 포괄적 다자라운드보다는 협상의제와 참여 회원국 측면에서 다양한 형태의 협상이 진행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협상 타결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보기도 쉽지 않다. DDA와 같은 포괄적 협상은 분야별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회원국들에 협상이익의 균형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이러한 기회가 약화되거나 없어진다면 다자협상에서의 성과도출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다른 분야에서의 보상이 없다면 농산물 국내보조 지급국들이 보조금을 감축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농산물 수입국들은 시장을 더 개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익의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소규모 패키지를 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희망하는 회원국 간 우선 협상을 타결하고 이를 확산시켜 나가는 방식도 보다 활발히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개도국 우대 문제는 상당기간 대립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회원국의 능력과 수요에 따라 신축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수년간 WTO에서 타결된 협상을 보더라도 선진국, 개도국의 이분법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 신기후체제 수립을 위한 파리협정이 타결된 것도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한 교토의정서의 이분법을 벗어나 모든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이러한 사례들은 WTO 협상의 진전을 위해서 개도국 우대와 관련해 어떠한 타협이 필요할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그동안 WTO 규범체계에서는 제외됐던 새로운 의제들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 개도국은 투자, 노동, 경쟁정책, 글로벌가치사슬(GVC), 기후변화 등과 같은 이슈는 선진국들의 관심사항이며 이에 대한 논의는 농업 협상 등 미결 과제에 대한 노력을 분산시킨다는 이유 등을 들어 WTO에서 신의제 협상 추진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나이로비 각료선언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견을 그대로 기술하고, 새로운 의제에 대한 다자협상 출범을 위해서는 모든 회원국의 합의가 필요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새로운 이슈에 대한 다자협상이 가까운 미래에 출범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나이로비 각료회의는 우리나라의 통상정책 추진에 있어 중요한 과제를 던져 줬다. 무역자유화를 위해 FTA 확대도 큰 역할을 하지만 보편적인 자유화와 무역규범을 제공하는 WTO와 다자무역체제도 역시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FTA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도 WTO 체제가 신뢰성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도록 기여해야 할 것이다. 다자통상체제의 큰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에 우리나라가 통상정책의 종합적 틀 내에서 향후 WTO 협상의 진전방안에 대한 입장을 마련해 관련 논의에 실용적이고도 건설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자통상체제의 발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