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10차 WTO 각료회의는 9차 발리 WTO 각료회의에 이어 도하개발의제(DDA; Doha Development Agenda) 협상 중 소규모 패키지에 합의함으로써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최초의 WTO 각료회의였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어려운 협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빈개도국(LDCs; Least Developed Countries)에 대한 2가지 이슈에 합의했다. 그중 하나가 최빈개도국에 대한 특혜원산지 규정(Preferential Rules of Origin)에 대한 합의였다.
최빈개도국이란 일인당 GDP가 1천달러 미만 수준의 국가로 전 세계 국가 중 UN이 지정한 48개국(이 중 WTO 회원국은 34개국)을 의미한다. 시장경쟁과 자유교역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WTO에서도 이러한 최빈개도국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여러 가지 특혜조치를 허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특혜조치가 무관세무쿼터(DFQF; Duty Free Quota Free)로 최빈개도국이 수출하는 상품에 대해선 관세부과와 수량제한을 하지 않는 것이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국가(모든 선진국과 칠레, 중국, 인도, 한국, 대만, 태국, 키르기즈공화국, 타지키스탄, 터키 등 9개 개도국)가 이러한 무관세무쿼터 정책을 도입했다.
무관세무쿼터 조치가 최빈개도국 수출을 증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질적 효과는 최빈개도국이 수출하는 상품이 그 나라의 원산지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인 ‘원산지규정’에 좌우된다. 농수산물 등과 같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상품이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이나 재료를 활용해 만들어진 완제품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원산지를 판정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무리 무관세무쿼터 제도를 도입했어도 원산지규정을 엄격하게 운영(예; 50% 이상의 부가가치를 최빈개도국에서 창출했을 경우에만 원산지 인정)한다면 무관세무쿼터 조치는 최빈개도국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국내산업이 취약하고 노동집약적 상품이 대부분인 최빈개도국의 경우 높은 부가가치 기준은 실현 불가능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무관세무쿼터 시장접근 개선’ 참여 확대
2001년 시작된 WTO DDA 협상은 개도국을 위한 무역과 개발(Trade and Development)을 주요 협상의제로 담고 있다. 최빈개도국에 대한 특혜원산지 규정도 무역과 개발에 포함된 의제다. DDA 협상 개시 이후 최초로 성과를 거둔 제9차 발리 WTO 각료회의에서 ‘최빈개도국에 대한 무관세무쿼터 시장접근 개선’,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규정’에 대한 각료결정에 합의했다. 무관세무쿼터 시장접근 각료결정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거의 모든 선진국이 최빈개도국에 대해 무관세무쿼터를 적용하고 있다. 전체의 97%에 해당하는 품목이 대상이며 이를 더 확대하고, 개도국들도 자발적으로 최빈개도국에 대한 무관세무쿼터 참여를 확대키로 했다. 그리고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규정에 대한 각료결정은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규정을 운영할 때 참고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각국이 활용하고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원산지규정 운영을 투명하게 하고 최빈개도국 부담을 고려해 가능한 한 단순화하자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현행 제도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수준의 내용이다. 이러한 각료결정은 최빈개도국이 희망한 특혜원산지 규정에 관한 구체적이고 구속력 있는 내용을 담자는 입장과 시행국들이 현행 제도에 대한 개정 부담을 피하려고 하는 입장 사이에서 협상을 통해 도출한 타협점이었다. 무관세무쿼터 제도와 특혜원산지 규정에 대한 각료합의를 통해 최빈개도국의 시장접근 확대를 지원해 다자교역체제로의 통합을 촉진하고, 경제성장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장려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를 더욱 진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발리 각료결정 이후 제10차 나이로비 WTO 각료회의에서 추가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협상이 최빈개도국의 제안서를 토대로 2015년 9월부터 본격화됐다. 최빈개도국의 제안서 내용은 2013년 발리 각료회의를 앞둔 시점에 제시한 내용보다 좀 더 강화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초반 논의는 최빈개도국과 시행국 간 입장차가 너무 커 서로의 주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고, 의장과 시행국은 최빈개도국에 실현 가능한 수준으로 내용을 수정해 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수정 제시한 내용도 당초 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논의는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에 우리나라와 캐나다, 뉴질랜드, 스위스가 공조해 중재성격을 지닌 아이디어 페이퍼를 제시했다. 4국 공동제안으로 말미암아 중단됐던 논의가 재개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WTO 내부에서는 지지부진한 다른 분야와 달리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협상에서는 합의가 나올 것 같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최대쟁점은 원산지판정 기준으로 부가가치 기준을 적용할 경우 수출국의 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비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여부와, 비원산지 비중으로 할 경우 허용 수준이었다. 미국, 호주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비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원산지 비중 40%나 비원산지 비중 60%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동일한 기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원산지를 입증하기보다는 비원산지를 입증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최빈개도국들은 비원산지 기준을 선호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해 대부분 국가가 비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각국이 채택하고 있는 최대 허용 비원산지 비중은 대략 40∼70%였다.
최빈개도국 요구 반영해 비원산지 최대 75%까지 허용하는 등 절충
두 가지 쟁점에 대해선 각료회의가 열린 나이로비에 가서야 최종 합의했는데, 첫 번째 쟁점의 핵심은 미국이 원산지 비중에서 비원산지 비중으로 기준을 바꿔주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전체회의와 미국과 최빈개도국 간 양자협의를 거쳐 합의한 내용은 ‘시행국은 부가가치 기준을 적용할 경우 비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채택해야 한다. 다만 현재 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국가는 이를 계속 사용할 수 있으나, 이 시행국이 특혜 프로그램을 개정할 경우 비원산지 비중을 기준으로 고려해 줄 것을 최빈개도국이 요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타협했다. 최빈개도국의 요구를 반영해 비원산지 비중을 방향으로 제시하면서도 현재 원산지 기준을 적용하는 미국과 같은 국가에 직접적 부담은 주지 않는 것으로 절충한 것이다. 한편 비원산지 비중의 수준에 대해선 최대 75%까지 허용하도록 고려(shall consider)하는 선에서 합의했다. 논의과정에서는 구속력 있는 최소허용기준을 도입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최빈개도국은 최대치를 선호했다. 그 밖의 주요 합의내용으로 최빈개도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 품목에 두 가지 이상의 원산지 기준 적용을 가능한 한 피하고, 누적원산지 적용을 확대하도록 장려’하는 등 다양한 내용이 합의됐다.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규정 합의는 이번 나이로비 각료회의 합의사항 중 유일하게 제네바에서 충분한 협의를 거친 협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머지 이슈는 제네바를 떠나기 전에도 전혀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이로비 현지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소수 국가들 중심으로 협상이 타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합의는 발리 각료결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행국가의 유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최빈개도국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특혜원산지 규정의 전반적인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과정에서 소수그룹에 포함됐던 최강대국 미국에 간접적으로나마 제도 변경의 압력을 주는 합의에 도달했다는 점이 다자협상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규정 협상은 개발이슈의 하나로 인도적 차원에서 최빈개도국에 일방적으로 특혜를 주는 제도이므로 시행국에게 당장 직접적 이득은 없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서 소득분배의 양극화와 부의 불평등이 문제가 되고 있듯이 국제적으로도 국가 간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어 이를 개선하고 공동발전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개발이슈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한국은 최빈개도국에서 출발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유일한 나라다. 모든 나라가 우리의 성공사례를 따르고 싶어한다. 그런 차원에서 개발이슈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할과 기여는 그 어떤 나라보다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의 최빈개도국 특혜원산지 제도는 국제적으로 중간 이상의 수준(비원산지 비중 기준을 채택하고 있으며 최대 60% 허용, 한 품목에 한 가지 기준 적용 등)이며 최빈개도국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활용해 협상과정에서 중간자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고 건설적인 합의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자협상은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다. 우리나라가 지닌 장점을 적극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을 찾고 그 위상과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